사회/역사 10

역사란 무엇인가 제2판 서문

내가 1960년에 여섯 차례의 강연으로 구성될 ‘역사란 무엇인가’의 첫 번째 초고를 완성했을 때, 서구세계는 아직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의 충격과 러시아와 중국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중대한 혁명의 충격 때문에 비틀거리고 있었다. 순진한 자신감을 보여주었던 그리고 습관적으로 진보를 믿었던 빅토리아 시대는 멀찌감치 지나가버렸다. 세계는 혼란스럽고 심지어는 위험스럽기까지 한 곳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떤 어려움들로부터는 벗어나기 시작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징후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전쟁 끝에 도래하리라고 널리 예견되었던 세계경제의 위기는 발생하지 않았다. 우리는 조용히 대영제국(大英帝國)을 해체했으며, 아무도 그것을 거의 깨닫지 못했다. 헝가리와 수에즈 운하의 위기는 극복되었거나 아니면 점차 잊혀..

사회/역사 2015.01.21

사회주의 100년 2014년판 서문

『사회주의 100년One Hundred Years of Socialism』 초판에서는 제2인터내셔널이 탄생한 1889년에 시작된 20세기 서유럽 사회주의 정당의 역사를 돌아봤다. 초판 이후 새로운 기록이 발굴되고, 각종 회고록이 줄을 잇고, 다양한 해석을 제시하는 책이 쏟아졌다. 하지만 서유럽 사회주의 정당과 공산주의 정당이 겪은 흥망성쇠에 관한 기본적인 이야기는 달라진 게 없다. 사회주의의 미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공산주의가 사망했다는 1996년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는 (정확히 말하자면 현대 사회민주주의는) 아직 수명이 다하지 않았다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런 기대는 근거가 전혀 없지 않은데도 두 가지 운동의 과제가 달라진..

사회/역사 2014.10.27

프랜시스 윈의 "자본론 이펙트" 머리말 : 미지의 걸작

1867년 2월,『자본론(Das Kapital)』제1권의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기 바로 얼마 전, 카를 마르크스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에게 발자크의 작품『미지의 걸작(Le Chef-d'oeuvre inconnu)』을 꼭 읽어보라고 권했다. 그는 이 소설 자체가 또한 걸작이라면서 "최고로 유쾌한 역설들이 그득한 작품"이라고 평했다. 오늘날 우리는,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권고를 주의 깊게 듣고 이 책을 읽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만일 그랬다면 그런 역설들은 여기저기서 발견했을지 모르나, 마르크스가 그 책을 그렇게까지 재미있다고 여긴 것에는 조금 놀라지 않았을까 싶다.『미지의 걸작』 이라는 작품은 프랭오페르라는 어느 대단한 화가의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다. 그는 이 이야기에서, 10년 동안 단 하나의 초..

사회/역사 2014.08.17

민주화라는 이름의 허상

정말이지 요새 '민주화'라는 구호처럼 신경을 건드리는 말도 없다. 우선 무엇이든지 제법 가지거나 꽤나 내세울 게 있는 사람들에게 민주화라는 화상(畵像)이 기존의 모든 질서를 싸그리 뒤엎고 지금까지 누려온 이익을 송두리째 뺏어가려는 사탄처럼 생각되기 일쑤일 터이고, 반대로 수중에 지니거나 별로 앞세울 게 없는 사람들로서는 그 민주화가 소리만 요란했지 무엇 하나 구체적으로 내놓은 것이 없는, 이를테면 말로만 배부를 허깨비가 아니냐고 의심하기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화란 적어도 당분간은 이 양쪽 모두에게서 원망의 대상이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을 듯하다. 민주화가 이런 서운한 대접을 받게 되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없지 않다. 그 하나는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포괄되는 갖가지 내용들에 대해 충분한..

사회/역사 2014.02.05

[발췌] 대처리즘의 문화정치

스튜어트 홀, "대처리즘의 문화정치", 임영호 옮김, 한나래, 2007 Stuart Hall, "The Hard Road to Renewal : Thatcherism and the Crisis of the Left", Verso Books, 1988 이데올로기적으로 대처리즘은 '자유 시장'과 경제인이라는 자유주의 담론과 전통, 가족, 국가, 명예, 가부장주의와 질서 등의 유기적 보수주의의 주제를 결합해 새로운 담론 접합체를 만들어낸 것으로 간주된다. ...... 아주 일반적으로 말해, 또 수많은 명예로운 예외들을 제쳐두고 보면 좌파의 정치분석은 가엾을 정도로 빈약하며, 이데올로기적 분석은 어느 편이냐 하면 더 열악한 상태에 있다. 이 둘은 인습에 사로잡힌 채 이루어지고 있어, 오늘날의 사태 진전이 형성되..

사회/역사 2010.05.09

책 두 권, 메모

1. 노무현, 성공과 좌절, 학고재, 2009 퇴임 직전인 2007년 후반부터 서거 직전인 2009년 4월까지 전대통령 노무현의 글과 구술을 모아 엮은 책. 그가 쓰고자 했던 회고록의 구상을 담은 메모와 홈페이지의 글, 간략한 일대기와 집권 후기의 정권 홍보성 평가가 담겨 있다. 대부분 언론 보도나 지지자들의 글을 통해 접했던 내용이라서 시사에 관심을 두고 있던 사람이라면 굳이 사서 읽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읽어보니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엔 가장 양심적이었고 양심적이고자 노력했으며, 그래서 부끄러움을 알았고 지적훈련도 게을리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무엇을 성공했고 무엇에 좌절했는지,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에 관한 반성적 성찰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민주당계 정치인들은 '노무현 정신'..

사회/역사 2010.03.05

길은 복잡하지 않다

이갑용, "길은 복잡하지 않다", 철수와 영희, 2009 제목과는 다르게 노동자 이갑용이 걸어온 길은 쭉뻗은 탄탄대로가 아니라 굴곡의 연속이었다. 민주노조 운동에 동참한 그의 길엔 회사, 어용노조, 경찰, 정부, 노동계 내부의 정파이기주의라는 장애물들이 가득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쫓기다 골리앗 크레인까지 올라가 보지만 달성하고자 했던 목적은 이루지 못하고 언제나 쓰디 쓴 분루만 삼켜야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늘 패배하면서도 민주노조는 성장한다. 이갑용 역시 평조합원에서 노조간부로 거대기업 노조위원장과 민주노총 위원장으로 그리고 광역시의 구청장으로 신분이 상승한다. 이런 일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책에 의하면 유혹과 탄압에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원칙을 지키며 운동을 한 것이 그 비결이다. 동료 노동..

사회/역사 2010.03.02

미국 대 존 레논

The U.S. vs. John Lennon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두드러졌던 존 레논의 정치 행적과 미국의 탄압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한국에는 "존 레논 컨피덴셜"이라는 제목으로 DVD가 발매되었다. 레논의 생전 영상과 당시 기록물, 오노 요코를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의 증언 그리고 FBI의 비밀 해제문서를 통해 레논이 처했던 환경과 그에 따른 그의 행동을 밝힌다. 존 레논이 어떤 성향의 인물이었는지는 다들 알테고, 그런 그를 미국 정부가 어떻게 다뤘을지도 능히 짐작 가능하다. 영화를 보고 알게 된 것은 존 레논은 알려진 것보다 몽상적이지 않았으며 미국 정부, 특히 닉슨과 정권 핵심인사들은 생각보다 비열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그는 마약에 취한 건지 오노 요코와의 사랑에 푹빠져서 그런건지 ..

사회/역사 2010.02.13

혁명 만세!?

그러니까 자코뱅의 몰락이 공포에서 평화로의 이행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첫번째 사실은, 바로 그날, 단 하루 만에 로베스피에르 및 그의 동료 70명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으니 이는 혁명 전 기간을 통틀어 최고 기록이다. ...... 리옹에서는 자코뱅 당원 300명을 창고에 몰아넣고 불을 질러 죽이는 만행이 벌어졌다. 혁명성지 판테온에 안치되어 있던 마라의 유해는 버려졌다. 코뮌은 제 기능을 박탈당했고, 가난한 유권자들을 배제하는 선거법 개정이 이뤄졌다. 음식 값 상한제가 철폐된 탓에 기근이 벌어지자, 신정부를 지지하던 한 신문은 이렇게 썼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얼굴들은 죄다 수척하고 창백하다. 고통과 피곤함, 패고픔과 피로의 기색이 역력한 얼굴들이다." 가격상한제 법으로 돌아가자는 상퀼로트들의 봉기가 몇 ..

사회/역사 2010.02.10

재일동포와 일본의 기만

1. 어지간해선 영화를 보다 마는 경우가 없는데 ‘박치기’ 를 보다 그냥 꺼버린 적이 있다. 극중에서 양심적 일본인으로 등장하는 오다기리 죠의 대사를 듣고 몹시 짜증이 났기 때문이다. “일본은 한반도를 식민지배 했어. 이름까지 바꾸게 했어. 천황과 관련이 있는 한자까지 못쓰게 했지. 60, 아니 70만 명이 소, 돼지처럼 일본으로 끌려왔어. 그 다음엔 소련과 미국이 전쟁을 일으켜서 조선을 놓고 서로 가지려고 싸웠지. 전쟁으로 5백만이 죽었어. 지금도 휴전 중이야. 아직 끝난 게 아니라 잠시 쉬는 중이지” 이외에도 조선인들의 비애를 짚어주는 대사가 몇 번 더 나온다. 재일조선인의 일본 거주 경위와 분단의 실상을 지적한 옳은 소리들 이었는데 나는 왜 기분이 상했을까? 몇 번 생각해봤는데 아직 이유를 알아내지..

사회/역사 2007.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