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역사

역사란 무엇인가 제2판 서문

planet2 2015. 1. 21. 01:23

내가 1960년에 여섯 차례의 강연으로 구성될 역사란 무엇인가의 첫 번째 초고를 완성했을 때, 서구세계는 아직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의 충격과 러시아와 중국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중대한 혁명의 충격 때문에 비틀거리고 있었다. 순진한 자신감을 보여주었던 그리고 습관적으로 진보를 믿었던 빅토리아 시대는 멀찌감치 지나가버렸다. 세계는 혼란스럽고 심지어는 위험스럽기까지 한 곳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떤 어려움들로부터는 벗어나기 시작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징후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전쟁 끝에 도래하리라고 널리 예견되었던 세계경제의 위기는 발생하지 않았다. 우리는 조용히 대영제국(大英帝國)을 해체했으며, 아무도 그것을 거의 깨닫지 못했다. 헝가리와 수에즈 운하의 위기는 극복되었거나 아니면 점차 잊혀졌다. 소련에서의 탈()스탈린화와 미국에서의 탈매카시화는 바람직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독일과 일본은 1945년의 철저한 폐허에서 급속하게 재건되었고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하고 있었다. 드골이 통치하던 프랑스는 그 힘을 새롭게 추스르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아이젠하워의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희망에 찬 케네디 시대가 막 밝아오기 시작했다. 오점으로 얼룩진 지역들 남아프리카, 아일랜드, 베트남 은 아직도 손만 대면 처리될 수 있었다. 전세계적으로 주식거래는 호황이었다.

 

어쨌든 이러한 조건들은 내가 1961년에 강연을 끝마쳤을 때 표명했던 낙관주의와 미래에 대한 신념에 피상적이나마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후 계속된 20년은 이러한 희망들과 만족감을 좌절시켰다. 냉전은 핵 멸망의 위협을 동반하면서 배가된 힘으로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뒤늦게 찾아온 경제위기는 서구사회 전역에 걸쳐 산업국가들을 황폐화시키고 실업이라는 암을 확산시키면서 무서운 기세로 시작되었다. 오늘날 폭력과 테러리즘의 적의(敵意)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국가는 거의 없다. 중동 산유국(産油國)의 저항은 서구의 산업국가들에게 불리한, 역학관계에서의 중대한 변화를 초래했다. 3세계는 국제사회의 수동적인 요소에서 능동적이고 시끌벅적한 요소로 변했다. 이러한 조건들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낙관주의를 표명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처럼 보이게끔 되어버렸다. 재난을 예언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재난인 법이다. 선정적인 작가들과 저널리스트들에 의해서 정성스레 묘사되어 언론매체를 통해 전파된 임박한 파국의 모습은 일상어(日常語)에까지 스며들었다. 한때 인기를 끌었던 세계의 종말에 관한 예언이 그토록 시의적절하게 여겨진 적은 지난 몇 세기 동안에는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상식적으로 두 가지 유보사항이 제기된다. 첫째, 미래의 희망이 없다는 진단은, 설령 논박될 수 없는 사실들에 근거하고 있다고는 해도, 일종의 추상적인 이론적 구성물이라는 점이다. 엄청난 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전혀 믿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은 이 불신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여 아기를 갖고, 자식들을 낳아 참으로 헌신적으로 키운다.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다음 세대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한 건강과 교육에 엄청난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새로운 에너지원이 끊임없이 개발되고 있다. 다수의 소액저축가들이 국가의 채권형 저축에, 주택금융조합에 그리고 지역신탁에 투자하고 있다. 미래의 세대를 위해서 건축분야나 예술분야의 민족유산을 보존하려고 열중하는 모습들이 흔히 보인다. 가까운 장래에 세계가 멸망할 것이라는 믿음은 오늘날 그것의 유포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불만에 가득 찬 지식인 집단에만 국한되어 있다고 결론 내리고 싶다.

 

두 번째 유보사항은 전면적인 재난에 대한 앞과 같은 예언들의 지리적인 출처와 연관되는 것으로서, 그 출처가 대개 나로서는 전적으로라고 말하고 싶지만 서유럽과 그 해외지점들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5세기 동안 위의 지역의 나라들은 이론(異論)의 여지없이 세계의 지배자들이었다. 그들은 외부에 있는 야만의 암흑세계에 문명의 빛을 선사했다고 꽤 그럴듯하게 주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주장에 점점 더 강하게 도전하거나 거역하는 시대는 틀림없이 재난을 키워나가리라는 것이다. 혼란의 진원지, 가장 심각한 지적(知的) 비관주의의 환부(患部)가 영국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19세기의 화려함과 20세기의 우중충함이, 19세기의 우월함과 20세기의 열등함이 그렇게 두드러지게 또한 그렇게 애처롭게 대비되는 지역은 영국말고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 분위기는 서유럽과 - 아마도 정도는 덜하겠지만 - 북아메리카에까지 확산되었다. 그 모든 나라들은 19세기의 거대한 팽창주의 시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분위기가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지배적인 것이 되지 않을까 하고 우려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한편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커뮤니케이션의 장벽이 세워진 것,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냉전이 끊임없이 선전되고 유포된 것, 이것들이 소련의 상황에 대한 어떠한 양식 있는 평가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불만이 어떻든지 간에 주민의 대다수가 25년 전이나 50년 전이나 100년전 보다는 틀림없이 사정이 훨씬 나아졌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런 나라에서 미래에 대한 절망이 널리 퍼진 채 사라지지 않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중국이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둘 다 선도적인 위치에 서게 되었다. 중동과 아프리카의 신생국가들, 심지어는 현재 혼란 상태에 있는 지역들의 신생국가들은 아무리 맹목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자신들이 믿는 미래를 향해서 투쟁하고 있다.

 

나의 결론은 파괴와 쇠퇴 이외에는 아무것도 내다보지 않으면서 진보에 대한 모든 신념과 인류에 의한 더 나은 진보에 대한 모든 전망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배제해버리는 오늘날의 회의주의와 절망의 조류는 엘리트주의의 한 형태 - 위기에 의해서 자신들의 안전과 자신들의 특권을 가장 현저하게 침식당해온 엘리트 사회집단의 산물, 그리고 한동안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확실한 지배권을 박탈당해버린 엘리트 국가들의 산물 - 라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의 주된 창도자들은 지식인들, 즉 자신들이 봉사하고 있는 그 사회의 지배집단의 이념을 전파하는 자들(‘한 사회의 이념은 그 사회의 지배계급의 이념이다’)인 것이다. 문제가 되고 있는 지식인들 중의 일부가 그 출신성분에서 다른 사회계급에 속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식인이 됨으로써 자동적으로 지식인 엘리트들에게 동화되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은 하나의 엘리트 집단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맥락에서 더 중요한 것은 사회 내부의 모든 집단이 아무리 응집력이 있다고 해도(그리고 역사가가 그들을 그런 식으로 취급하는 것은 대개는 정당한 것이지만), 그 속에서 별종들이나 반항아들이 어느 정도는 돌출한다는 점이다. 이런 일은 특히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어나기 쉽다. 나는 일반적으로 사회의 중요한 전제들을 인정하고 거기에 기초하여 행동하는 지식인들의 판에 박힌 주장이 아니라, 그런 전제들에 도전하고 거기에 기초하여 행동하는 지식인들의 주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도전들이 한줌밖에 안 되는 반대자들에 국한되는 한, 그것들은 서구의 민주사회에서는 용인되며 또한 그 도전자들에게는 독자와 청중이 있을 수 있다. 냉소주의자는 그 도전이 빈번하지도 않고 위험스러울 만큼 영향력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용인되는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40년이 넘도록 나는 지식인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살아왔다; 그런데 최근에 나는 점차 내 자신을 저항적 지식인(intellectual dissident)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남들도 그렇게 생각해왔다. 손쉽게 한 가지만 이야기하겠다. 나는 분명히 신념과 낙관주의로 가득 찬 위대한 빅토리아 시대 중에서도 대낮이 아닌 저녁놀 속에서 성장하여 아직도 글을 쓰고 있는 극소수의 지식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며, 그래서인지 나에게는 끊임없이 또한 돌이킬 수 없이 쇠퇴하고 있는 세계를 생각하는 것은 지금까지도 어려운 일이다. 나는 이 책에서 서구 지식인들의 그리고 특히 오늘날 이 나라 지식인들의 지배적인 경향으로부터 내 자신을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이 어떻게 길을 잘못 들었는지를 그리고 왜 길을 잘못 들었다고 내가 생각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또한 비록 낙관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미래에 대한 보다 건전하고 보다 균형잡힌 전망을 주장하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E. H. 1982





이 글은 1982년에 쓰여졌다고 한다. "역사란 무엇인가"의 제2판은 집필 준비 단계에 있었다. 카는 그 해에 타계했다. 안타깝게도 지금으로썬 카의 낙관적 신념은 거의 완전하게 패배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소박하게 희망을 걸었던 소련은 10년도 못가 무너져버렸고 세계는 지금 파괴와 쇠퇴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가 그의 기대에서 벗어난 길을 걷고 있다고 해도 "사회의 중요한 전제들에 도전하고 거기에 기초하여 행동하며, 미래에 대한 보다 건전하고 보다 균형잡힌 전망을 주장하기 위한 노력"은 여전히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오히려 그러한 노력은 이렇게 상황이 나빠질수록 더욱 절실하게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