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역사

사회주의 100년 2014년판 서문

planet2 2014. 10. 27. 00:58

사회주의 100One Hundred Years of Socialism초판에서는 제2인터내셔널이 탄생한 1889년에 시작된 20세기 서유럽 사회주의 정당의 역사를 돌아봤다. 초판 이후 새로운 기록이 발굴되고, 각종 회고록이 줄을 잇고, 다양한 해석을 제시하는 책이 쏟아졌다. 하지만 서유럽 사회주의 정당과 공산주의 정당이 겪은 흥망성쇠에 관한 기본적인 이야기는 달라진 게 없다. 사회주의의 미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공산주의가 사망했다는 1996년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는 (정확히 말하자면 현대 사회민주주의는) 아직 수명이 다하지 않았다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런 기대는 근거가 전혀 없지 않은데도 두 가지 운동의 과제가 달라진 건 오래전 일이다. 20세기를 특정지은 두 가지 형태의 사회주의, 다시 말해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스스로 설정한 과제라는 측면에서 결코 비슷한 범주에 놓일 수 없었다.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목적으로 출발했지만, 곧 다른 목적을 갖게 되었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작동하는 사회에 의해, 정치 · 경제적 권력과 맺은 관계에 의해 모습을 갖춰가므로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또 다른 목적을 갖는 건 불가피하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단단히 자리 잡고 민주주의가 주요 정당들의 공통 자산인 나라에서 정권을 잡았다. 공산주의자들은 산업사회를 만들어야 했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 사회를 관리해야 했다. 공산주의자들은 개발이 덜 된 사회에서 승리했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선진 시장경제에서 승리했다. 사회민주주의의 목표가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게 아니라 개혁이라는 사실이 받아들여진 뒤에는 역사가 공산주의 운동에 치명타를 가한 것과 달리 어떤 중대한 사건도 사회민주주의에 치명타가 될 수 없다는 게 분명해졌다.

 

  오늘날 유럽 특유의 사회민주주의가 미래에도 살아남을 것이라고 장담할 사람은 없다. 극소수 서유럽 국가에서 고립된 지역적 형태로 살아남는다면 혹시 모르지만. 물론 포괄적인 의미의 진보 정치는 상당수 유럽인은 물론이고 전 세계인에게 영감을 줄 것이다. 진보 정치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를 옹호할 것이다. 진보 정치는 앞으로도 차별받는 사람들의 권리를 지원하는 법률 제정에 앞장설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교육과 문화에 접근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견해를 지지하기 위해 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 의제에 헌신할 필요는 없다. 진보적인 자유주의나 사회적인기독교도 (혹은 이슬람교도), 심지어 동정심 많은보수주의자들도 사회주의자 못지않게 이런 문제에 헌신할 수 있다. 게다가 개인의 권리라는 원칙에 대해 사회주의자들에게 영감을 준 사상의 기원을 따져 들어가면 그곳엔 계몽주의가 있다. 정작 사회주의적 세계관이 세상이 등장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19세기 후반에 조직적인 정치 운동 세력으로 등장한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힘에 도전장을 내밀면서도, 계급 원칙보다 개인의 권리라는 (자유주의적) 사상을 토대로 한 민주주의의 확대를 지지했다. 사회주의자들은 보통선거권을 열정적으로 지지했다. 보통선거권은 한 표의 가치가 정확히 동일하다고 여긴다. 한 사람을 한 표로 계산한다는 뜻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통선거권을 지지한 사회주의자들은 정치 영역에서 계급의식과 거리가 먼 개인주의자들이었다.


  20세기로 전환되는 시점에 민주주의의 계급 개념을 옹호한 것은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의 개인의 재산이나 수십에 따라 표를 할당하는 선거제도를 지지했다. 심지어 대다수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는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데 반대했다. 사회주의자들은 비록 여성 투표권을 쟁취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싸우지는 않았지만, 진정한 의미의 보통선거권에 대해서는 한 발도 양보하지 않았다.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들을 압박해서 정치적 진보주의와 시민권, 인권을 받아들이게 만들고, 처음으로 자본주의 파괴와 개혁을 옹호한 것은 사회주의자들이 남긴 업적 가운데 하나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물론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들도 큰소리칠 수 있다. 자신들이 사회주의자들을 압박해서 시장 관계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계급 없는 사회라는 공산주의를 포기하도록 만들었다고.

 

  사실이다. 그래서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 개혁에 착수했다. 자본주의 폐기라는 최종 목표와 비교하면 자본주의 개혁은 그야말로 일 같지도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자본주의를 개혁하는 것은 대단히 복잡한 일이다. 자본주의 개혁에 수반되는 일을 개념화하느냐가 문제다. 자본주의 체제가 이전 체제들과 다른 점은 그 핵심에 변화와 발전 과정이 있다는 점이다. 이런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을 가장 먼저 인정한 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다. 공산당선언 Communisi Manifesto의 유명한 단락에도 나오듯이 변화는 야수의 속성이 있다. 즉 변화는 끊임없이 자신을 개혁한다.


부르주아는 지속적으로 생산수단을 혁신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생산관계와 사회의 모든 관계를 끊임없이 혁신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 반대로 낡은 생산방식을 그 형태대로 보존하는 것은 이전의 모든 산업 계급이 생존하기 위한 첫째 조건이었다. 생산의 지속적 혁신과 모든 사회 계급의 끊임없는 방해, 영원한 불안정성과 동요는 이전의 모든 시대와 구분되는 부르주아 시대의 특징이다. 고정되고 급속하게 얼어붙는 모든 관계와 그런 관계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오래전의 공경할 만한 편견과 의견은 완전히 사라지고, 새로운 형태를 띤 모든 관계는 딱딱하게 굳기도 전에 구식이 된다. 단단한 것은 전부 녹아서 공기 중으로 사라지고, 신성한 것은 전부 더럽힌다. 인간은 마침내 자신의 현실적인 조건에 냉정하게 직면하고, 자신의 본질과 관계에 직면한다.

 

 이 책에서 줄곧 설명하듯이 사회민주주의의 딜레마는 복지국가나 부의 재분배 같은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 진영의 개혁이 사회의 평화와 소비재 시장을 확대해 자본주의를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데 있다. 그러나 복지국가와 부의 재분배라는 목표를 위해서는 강력한 자본주의가 필요하다. 자본주의 자체를 개혁하는 것이 목표인 개혁, 예컨대 노동 일수의 상한선을 정하고, 최저임금을 통해 임금에 개입하고, 출산휴가와 육아 휴가 같은 기본적인 노동권을 확립하려는 개혁은 자본주의 기업들 사이에서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낸다. 규모가 크고 시장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으며 효율성이 뛰어난 기업들은 운이 없거나 효율성이 떨어지거나 작은 기업의 실패 덕분에 이득을 본다. 큰 기업이 작은 기업보다 훌륭하게 개혁을 극복하는 경우가 많지만, 반드시 그렇다는 법은 없다. 적응력이 뛰어난 작은 기업이 과학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세상에 훨씬 더 효율적으로 대처하기도 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자체를 개혁하면 자국의자본주의 중에서 어떤 측면이 강화되고 어떤 측면이 약화될지 결정해야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자발적인개혁은 과학기술의 발전이나 이민, 천연자원 고갈처럼 자본주의 자체에서 비롯된 변화가 도화선이 되어 일어날 수도 있고, 날씨나 미각, 패션의 변화처럼 어느 정도 외적인 요인에서 비롯된 변화가 도화선이 되어 일어날 수도 있다. 사실상 자발적인개혁은 모든 것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량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두 가지 강력한 수단을 사용할 수 있다. 첫째 수단은 노동운동으로, 대부분 자본가들에게 요구 조건을 내거는 노동조합의 형태로 조직된다. 둘째 수단은 민주적인 국가다. 민주적인 국가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세력이 커져 정권을 잡으면서 중요해졌다. 민주적인 국가는 좌파가 국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였다. 여기에서 국가는 개념으로서 국가가 아니라 기구로서 국가, 강압적인 조직으로서 국가,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수단으로서 국가를 말한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국가를 받아들인 것은 20세기 후반의 일이다. 그들이 이처럼 늦게 국가를 받아들인 이유는 1945년 이전에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정권을 잡는 일이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굳이 정부에 참여하지 않고도 부르주아 국가를 압박해서 사회주의 개혁을 상당 부분 실행에 옮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공적인 것res publica, 국가를 직접 관리하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도 싸움에서 이기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유럽(특히 독일과 영국)에서 복지국가라는 전제를 제시한 것은 보수주의나 자유주의 세력이었다. 사회주의 운동이 두렵기도 했고, 대중의 압력 때문이기도 했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번식 비용 일부를 사회화하고(복지국가), 노동 일수를 규제하는 데는 굳이 사회주의 정당이 필요하지 않았다. 강력한 노동조합들은 정치 정당이 없는 경우에도 노동 일수와 근로조건, 휴일 수당 등을 놓고 얼마든지 고용주와 싸우고 협상할 수 있었다. 강력한 노동조합은 압력단체 같은 역할을 하면서 정당들의 팔을 비틀어 양보를 얻어냈다.

 

  방금 예로 든 사례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존재하지 않던 19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영국 노동계급은 규모가 크고, 당시 기준으로 볼 때 오랜 투쟁의 역사를 통해 조직이 잘 갖춰진 상태였다. 어느 정당도 노동자를 무시하지 못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노동계급의 종교적 분열 때문에 유럽 대륙의 기독교 정당 같은 종교 정당이 출현할 수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1850년대 이후에는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이 노동계급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경쟁했고, 저마다 강령에 사회민주주의적 공약을 넣었다. 사회민주주의가 조직적인 정치 정당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의 일이었다. 이런 환경 때문에 영국에서는 독일 사회민주당SPD을 본뜬 거대 사회주의 정당이 늦게 탄생하고 더디게 성장했다.

 

  유럽 대륙에서도 영국과 비슷하게 대안적인 공약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즉 하층계급에서 제기하는 요구를 받아들이기 위한 국가를 건설하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k가 건설하고 사회주의 지도자 페르디난트 라살레Ferdinand Lasslle가 지지한 이러한 국가 형태를 국가사회주의state socialism’라고 불렀다. 자유주의 정당과 보수정당, 민족주의 정당은 국가사회주의 운동을 맨 앞에서 이끌었다. 이들은 교회에 기반을 둔 정당들과도 손잡았다. 그들과 손잡은 결정적인 계기는 1891년 레오Leo 13세가 발표한 회칙 레룸노바룸Rerum Novarum이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 회칙을 통해 구체제를 고집스럽게 옹호하던 태도를 버리고 사회문제에 새로운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현실 정치에서 사회주의자와 비사회주의자 사이에 확실하고 영구적인 경계선을 긋기란 불가능했다. 민주주의 확대, 복지국가 도입, 노동 일수 규제는 사회주의의 목표와 정책이었지만, 이제 우파와 중도파, 보수파, 자유주의, 기독교, 민족주의 가릴 것 없이 모든 비사회주의 정당들이 사회주의 정책과 비슷한 요구를 했다. ‘사회주의는 시작부터 사회주의자들의 특권이 아니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일상적인 활동에서 불필요한 요구를 포기하고 타협을 받아들이라는 강요를 받았다. 그러나 그런 강요를 받은 건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민주주의가 확대되고 대중사회가 등장했다는 것은 현 상황을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그대로 유지(보수의 본질적인 입장)하자고 주장하거나 현 상황 이전으로 복귀(극우의 본질적인 입장)하자고 주장해서는 어느 정치 정당도 충분한 지지를 기대하기 힘들어졌음을 의미했다. 승자는 개혁주의였다. 참으로 다양한 세력이 개혁주의를 채택했다. 독일에서는 비스마르크와 이후 독일제국 시대의 정치인들, 중앙당의 사회주의적기독교도들이 개혁주의를 채택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자유당(조반니 졸리티Giovanni Giolitti)의 다수파와 떠오르는 정치적 가톨릭주의 세력이, 프랑스에서는 제3공화정의 급진주의자들이 개혁주의를 채택했다. 영국에서는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와 숄즈베리Robert Salisbury가 이끌던 보수당, 조지프 체임벌린Joseph Chamberlain, 글래드스턴William Ewart Gladstone, 신자유주의자들, 애스퀴스Herbert Henry Asquith,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가 개혁주의를 채택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반유대적인 카를 뤼거Karl Lüger의 사회주의 기독교 세력이, 네덜란드에서는 좀 더 계몽된 자유주의자들과 손잡은 새로운 기독교 정당들이 개혁주의를 채택했다.

 

  승리한 모든 정치 이데올로기가 그렇듯이 개혁적 사회주의가 승리한 원인은 자신들이 옹호하는 정책을 독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치 분야에서 성공이라는 말을 하려면 한 사람이 정상적이거나 바람직하거나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을 반드시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어떤 사람이 정상적이거나 바람직하거나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전체 정치적 조직체의 공동 자산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념적 포장(상징과 언어)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요구해야 한다. 이는 이념적 가치와 실제 정책의 연결 고리가 모호하고 헐거워서 언제라고 기꺼이 협상할 수 있는 자세가 되었을 때 가능한 얘기다. 왜 그럴까? 그런 상황이 마련되면 사회주의 최종 목표에 서명하지 않고도 충분한 연금 지급에 찬성하는 것이 가능하므로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도 충분한 연금 지급을 위해서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소규모 정치정 종파가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 것도 맞지만, 실질적인 패권을 목표로 하는 정당이나 운동은 일관성을 고집하다가 파멸에 이르고 만다.

 

  자신들의 생각을 모든 사람과 공유해야 한다는 목표가 더 중요해지고 자본주의 이후의 국가라는 최종 목표가 어느 때보다 먼 미래로 연기됨에 따라, 사회주의자들은 현재의 국가에 더욱 헌신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회주의자들이 보통선거권을 요구할 때 국가는 좀 더 쉽게 그들의 요구를 수용했다. 보통선거권은 모든 시민의 요구를 대신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요구를 통해 사회주의자들은 예전보다 합법적인 세력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더 강력해졌다. 이제 사회주의자들은 국가기구를 차지함으로써 정치적 권력을 손에 넣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정권을 장악하면서 노동 일수 규제, 생산과 재생산 비용의 사회화 같은 나머지 개혁 강령을 좀 더 수월하게 실행에 옮겼다. 이런 조치는 산업사회를 완전히 탈바꿈했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를 개혁하는 데 성공했음을 입증한 사회주의자들이 규제력 있는 기관들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 한 것은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다. 즉 사회주의자들은 대규모 공공 부문이나 강력한 중앙은행, 외환 관리 기구, 보조금과 지역 정책에 관한 복잡한 제도, 노동시장 통제를 위한 얽히고설킨 구조를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이런 규제 측면은 자본주의를 향한 모든 사회주의 정책의 핵심이 되었고, 자본주의 폐지라는 해묵은 목표는 덜 중요해졌다. 자본주의 성장이 가져다준 번영, 완전고용 확립, 복지국가라는 보호 장치, 서방의 소비사회에 견줄 만한 소비사회를 만들어낼 수 없는 공산주의 국가의 명백한 무능력 같은 것들 때문에 자본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적대감은 거의 사라졌다. 기독교적 가치관이나 보수주의적 가치관에 헌신하는 정당들은 과거에 자본주의를 앞장서서 지지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들도 자본주의의 미덕을 발견했다. 이처럼 좌파 정당들은 점진적이지만 끊임없이, 저마다 다른 정치적 국면에 맞춰, 무엇보다 선거의 우여곡절에 맞춰 다양한 속도로 급진적인 반자본주의적 상징들을 내던졌다. 수정주의로 불리는 이런 과정은 1950년대 말 독일 사회민주당의 바트고데스베르크Bad Godesberg 전당대회에서 가속화되어 1997년 토니 블레어Tony Blair의 새로운 노동당으로 완성되었다. 이때가 되면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시장 자본주의가 유럽 정치에서 과거와 비견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요소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이런 경향은 가톨릭 색채가 강한 유럽(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독일 남부)에서 두드러졌다. 비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라고 하면 늘 전통주의적 형태(기독교 민주주의) 혹은 프랑스처럼 국가-대중적 형태(드골주의) 혹은 프랑스와 포르투갈처럼 권위주의적 인민주의 형태를 띠던 과거와 달라진 점이었다. 심지어 개신교를 믿는 북유럽에서도 농업 정당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패권을 장악하는 데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신자유주의가 중요한 위치를 확보했다. 자유방임 이데올로기의 원산지 영국에서는 1980년대 동안 자유 시장 자유주의free market liberalism가 지배적 지위를 차지했다.

 

  국가가 자본주의 경제를 규제하는 핵심 기관이라고 인식한 사회주의자들은 국가를 민주화하고 활용하려고 노력했으며,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국가가 주요 규제 기관의 위치를 확고히 유지하는 한 사회민주주의 전략은 완벽하게 일관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자본주의의 다양한 측면(특히 재정과 관련된 조직)이 발전하고 영향력이 커지면서 사회주의자들의 국가 지향적인 전략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정치가 한 국가의 문제라는 개념을 고집했고, 그런 개념을 끊임없이 강화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성취(복지, 교육, 시민권)가 국가의 영토적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동안, 자본주의는 세계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무너지면 이데올로기적 연관성 때문에 사회민주주의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거라는 근거 없는 예측을 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공산주의 붕괴가 사회민주주의 강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도 했다. 내가 이 책 마지막 장에서 지적했듯이, 실제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공산주의가 무너진 뒤 10년 동안 가장 강력한 모습을 보였다. 이러니저러니 말은 많지만 소련이 공식적으로 사망하기 훨씬 전부터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공산주의를 무시한 것은 사실이다.

 

  물론 서유럽 공산주의 정당은 소련의 몰락에 큰 영향을 받았다.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공산주의 정당이던 이탈리아 공산당은 오랫동안 사회민주주의를 향한 진화를 계속했다. 그러는 동안 당명이 자주 바뀌었고, 당명 변경은 이탈리아 공산당이 자신의 뿌리와 점점 더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여전히 망치와 낫 같은 과거의 상징이 일부 남아 있었지만) 좌파민주당Democratic Party of the Left으로 바꿨다가 다시 좌파 민주주의자Left Democrats로 바꾸더니, 나중에는 좌파Left라는 광범위한 꼬리표와 상징까지 떼어내고 한결같은 전망을 품은 채 간단히 민주당Partito Democratico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처럼 신임을 잃은 인물의 경쟁 상대조차 되지 못했다. 이탈리아 공산주의자들은 과거 자신들의 모습이 드리운 그늘에서 겨우 살아남았다. 이탈리아 사회당PSI의 운명은 더 심했다. 이탈리아 사회당은 1991~1992년의 부패 스캔들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아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

 

  유럽의 나머지 국가에서 공산주의 정당들은 전멸했다. 그렇다고 해서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의 영향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공산주의 정당의 위기는 장벽이 붕괴되기 훨씬 전부터 시작됐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기 전인 1988년 프랑스 대선에서 공산당 후보 앙드레 라좌니André Lajoinne6.7퍼센트 지지를 받는데 그쳤다(1969년에 자크 뒤클로Jacques Duclos는 득표율 21퍼센트로 훌륭한 성적을 거뒀다). 공산당 지지율은 갈수록 떨어졌다. 2002년 공산당 후보 로베르 위Robert Hue3.4퍼센트를 기록했고 2007년 공산당 후보 마리 조르주 뷔페Marie-George Buffet의 지지율은 참혹하게도 1.94퍼센트로 곤두박질쳤다. 심지어 트로츠키파 후보가 공산당보다 선전했다. 프랑스 공산당PCF은 소규모 집단으로 전락했다. 2012년 프랑스 공산당에서 출마해 당선된 국회의원은 열 명에 불과했다. 그중에서 여섯 명 이상은 별도의 조직을 구성했다. 서유럽에서 강력한 공산주의 정당 중 하나인 프랑스 공산으로서는 부끄러운 최후였다. 프랑스 공산당이 몰락한 결정적인 원인은 소련이 공산주의의 최후를 인정하기 훨씬 이전인 1970~1980년대에 프랑스에서 강력한 사회주의 정당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회당은 우파를 이기고 싶어 하는 모든 세력을 결집했다. 그리고 2002년 대선에서 리오넬 조스팽Lionel Jospin이 믿기 어려운 패배를 당한 뒤 사회당의 운이 다해가기 시작할 때 프랑스 공산주의는 소생 불능 상태가 되었다.

 

  다른 나라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의 상황은 암울했다. 1979년에 18.9퍼센트를 받은 포르투갈 공산당PCP1980년대 내내 지지도가 하락하더니 (녹색당과 연합한) 2011년 선거에서는 8퍼센트에도 못미치는 표를 얻었다. 스페인 공산주의자들은 포르투갈보다 갑작스럽게 몰락했다. 스페인 공산당PCE좌파의 미래라는 기치를 내걸었지만, 1996년 선거에서 득표율 11퍼센트에 그쳤고, 2008년에는 3.8퍼센트로 추락했다. 그나마 2011년에는 세계 금융 위기 덕분에 6.9퍼센트로 지지율이 상승했다.

 

  극우 정당들은 전반적으로 극좌 정당들보다 훨씬 높은 지지를 받았다. 2012년 프랑스 대선에서 마린 르 펜Marine Le Pen17.9퍼센트를 얻었고, 오스트리아 자유당FPÖ17.5퍼센트(2008), 벨기에 플랑드르 민족당Vlaams Blok15퍼센트(2011), 덴마크 국민당Danks Folkeparti12.3퍼센트(2011), 네덜란드 자유당PVV10퍼센트를 얻었다. 오스트리아 대선에서 극우 후보 바르바라 로젠크란츠Barbara Rosenkranz의 득표율은 15퍼센트가 넘었다. 좌파 정당으로서 국가에 닥친 심각한 위기를 활용한 것은 그리스 시리자(Syriza : 급진 좌파와 통합사회전선 연합)뿐이다. 2012년 두 번째 선거에서 시리자는 27퍼센트에 가까운 득표율로 제1야당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극우 정당은 선전했다. 나치당의 후신인 황금새벽당Golden Dawn6.9퍼센트로 주목할 만한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처럼 1989년 이후 유럽에서 영향력을 발휘한 조직적 좌파 세력은 사회민주주의가 유일했다. 과거 공산당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거듭난 중유럽과 동유럽도 여기에 포함된다. 중유럽과 동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복지국가와 노동자 보호라는 공산주의 체제의 긍정적인 측면을 끝까지 옹호하고 확대했다. 친시장 세력이 활개를 치고 광범위한 지역에서 국제적인 지지를 받음에 따라 노동자를 보호할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이렇게 (공산주의 시절의) 과거에 한 발을 딛고 부활한 좌파의 전망은 처음에 상당히 밝아 보였다. 1989년 이후 자유선거가 처음 치러졌을 때, 과거 공산권 국가에서 공산당이던 정당들이 가장 강력한 좌파 정당으로 올라섰다. 공산당이라는 당명을 그대로 유지한 체코는 예외였다. 체코를 제외한 옛 공산권 국가의 공산당은 당명을 사회민주주의나 그 비슷한 이름으로 바꿔서 전통적인 서유럽 사회주의 운동과 명확한 경계선을 그으며 탄생한 공산주의의 실패를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방부 처리된 레닌의 시신은 여전히 모스크바를 찾는 관광객을 위해 전시됐지만, 레닌주의는 완전히 사망하고 없었다.

 

  사회민주주의는 한때 공산주의가 만연한 나라에서 살아남았지만, 번성을 누리지는 못했다. 헝가리 사회당(전 공산당)2008년 선거에서 42.8퍼센트가 넘는 득표율을 올렸고(1994년에는 겨우 33퍼센트였다) 자유주의 세력과 손잡았지만, 2010년 사회당의 득표율은 19.3퍼센트로 뚝 떨어진 반면 보수적인 청년민주동맹(Fidesz : 유럽의 주류 보수정당들보다 훨씬 우파 쪽으로 기운 정당)은 과반 의석을 차지했다. 그들이 얻은 과반 의석은 전후 유럽 선거 문화에서 이례적인 위업이었다. 헝가리 사회당은 불만 세력을 결집할 능력이 없었다. 그 일은 극우 정당 요빅Jobbik이 해냈다. 요빅은 16.7퍼센트로 인상적인 득표율을 기록했다.

 

  불가리아 사회당(전 공산당)의 성적은 헝가리보다 조금 나았다. 2005년에 광범위한 선거 연합의 일원으로 참여한 선거에서 불가리아 사회당은 34퍼센트를 얻어 다른 정당들과 연립정부 형태로 재집권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뒤이은 2009년 선거에서 17.7퍼센트로 240석 중 40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폴란드에서는 민주좌파동맹SLD이 이끄는 좌파 정당 연합이 2001년 선거에서 완승을 거뒀다. 하지만 뒤이은 두 차례 선거에서는 연달아 완패했다.

 

  한마디로 중유럽과 동유럽에서도 사회민주주의는 확실하게 패권을 장악하지 못했다. 사회민주주의가 약하거나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에 강력한 공공 부문 유지나 성장에 따른 불평등 억제는 물론, 심지어 종전의 복지국가를 유지하는 것조차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았다. 덮어놓고 새로운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탓할 일은 아니었다. 허약한데다 겨우 존립하는 시장경제는 사회민주주의의 발전이나 유지를 위한 최상의 발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때 루마니아와 헝가리의 반체제 인사이자 헝가리 국회의 진보 진영 의원이던 타마스G. M. Tamás에 따르면, 공산주의 몰락 이후 잠시 동안 자유주의의 거품이 일어 광범위한 민영화가 진행됐고, “과거 공산주의국가 정당들은 신자유주의 의제에 맞게 재편성됐으며, ‘사회주의적복지국가라는 유물은 해체됐다.

 

  서유럽은 어땠는가? 사회민주주의적 수정주의는 어떤 상황에 처했고, 전망은 어땠을까? 물론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지금 서유럽에 존재하고, 앞으로도 한동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민주주의 정책을 떠받치는 추동력은 지난 10~20년에 걸쳐 바닥난 것이 아닐까? 여전히 자신을 사회민주주의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어떤 위안거리가 남아있기는 할까? 이 글을 쓰는 지금, 사회민주주의는 심각한 위기를 지나고 있다. 1990년대 끝날 때만 해도 위기는 전혀 없어 보였다. 1996년 로마노 프로디Romano Prodi는 과거 공산당원들을 포함한 정당 연합의 수장으로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를 누르고 전후 이탈리아 역사상 최초로 좌파정부를 구성했다. 이듬해(1997)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영국 노동당은 역사에 남을 득표 차이로 18년 동안 이어진 보수당의 통치를 끝내고 재집권에 성공했다. 같은 해 프랑스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사회당이 승리했으며, 리오넬 조스팽이 총리가 되었다. 1998년에는 독일 사회민주당 당수 게르하르트 슈뢰더Gehard Schröder가 총리에 올랐다. 이처럼 서유럽 4대 강국인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모두 좌파 정당이 집권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좌파의 약진은 4대 강국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다. 좌파는 (단독으로든 연합으로든) EU에 가입한 거의 모든 국가(스웨덴, 네덜란드, 핀란드, 오스트리아, 벨기에, 덴마크, 포르투갈, 그리스)에서 정권을 잡았다.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유례없는 호기를 활용해 유럽 대륙 차원에서 공동 정책을 개발했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까? 예컨대 그들이 공동으로 EU 전체를 아우르는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거나 재분배를 위한 재정 정책을 개발했다면, 혹은 유럽 전역에서 노동 규제를 강제하는 엄격한 제도를 도입했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세계 전체까지는 몰라도 유럽이라는 보루에서는 사회민주주의가 살아남아 번성했다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많이 달랐다.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은 저마다 국내 의제에 매달리느라 말로는 초국가적 통합에 공감을 표하면서도 실제로는 유럽 차원의 문제에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단일 통화로 유로화를 도입한 것도 범유럽 차원의 통제를 위한 발판이 되지는 못했다. 범유럽 차원에서 통제됐다면 유로화는 적절한 규제 장치가 될 수도 있었다. 영국에서는 새 노동당이 금융 제도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 유로화를 단일 통화로 인정하지 않았다. 사회민주주의가 민족국가라는 외피를 벗어던지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는 이 책 초판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이후에 일어난 모든 일을 통해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더 확실해졌다. EU는 서로 다른 자본주의 체제를 갖춘 국가들의 느슨한 연합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20세기가 저물어갈 즈음 당시 EU에 가입한 15개 국가의 금융 정책과 노사 관계, 복지 체제는 저마다 현저히 달랐다. 21세기 처음 몇 년 동안 12개 국가가 추가로 EU에 가입했다. 대부분 먼저 가입한 15개국 중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보다 가난하고, 산업 기반이 취약하며, 자본주의가 제대로 규제되지 않는 나라들이었다. EU가 힘들이지 않고 확대된 것은 축하할 일이지만, 쉽게 확대된 원인이 형식적인 통합 기구였기 때문이라는 점은 생각해봐야 한다. 상품과 자본, 사람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경쟁의 장벽을 없앤 것은 EU가 거둔 가장 큰 성과지만, EU는 유럽의 정치·사회적 차원에서 전혀 의미가 없는, 단순히 협상을 위한 국가들의 모임이었다. 사회주의 정당 사이에서 범유럽 차원의 협조는 전혀 없었다. 유럽 사회주의당PES30개가 넘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구성되었지만, 이 정당은 유럽의회 선거에도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정당이라고 할 수 없다(유럽의회 선거에서는 항상 유럽 정당이 아니라 각국의 정당들이 경쟁을 벌인다). 유럽노동조합연맹European Confederation of Trade Union은 선언문을 발표하고 협정을 교섭하는 압력단체일 뿐, 고용주나 정부가 위협을 느낄 만한 세력이 아니다. 유럽노동조합연맹은 국가별 노조에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전혀 없고, 회원 국가들이 초국가주의에 가한 제약 때문에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되었다. 게다가 세계와 조화를 위한 구실로 제한없는 경쟁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목표가 되었다.

 

  2007년에 시작된 세계적인 경기 침체는 유럽 통합에 반대하는 정서를 악화시켰다. 20129월에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 같은 확고부동한 EU 회원국 국민 사이에서 (아직까지는 우호적이지만) EU에 대한 평가가 하락했으며, 영국에서는 꽤 많은 국민이 EU를 지지했으나 45퍼센트에 그쳤다. 20135월에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독일의 EU 지지는 68퍼센트에서 60퍼센트로, 영국의 지지는 43퍼센트로 떨어졌다. 또 프랑스는 60퍼센트에서 41퍼센트로, 스페인은 (무려 200780퍼센트에서!) 46퍼센트로 EU 지지도가 추락했다. 이 모든 수치가 의미하는 바는 친유럽 정서가 경제 성적표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경제가 좋으면 유럽 통합을 지지하는 사람도 많아진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국내 정치가 가장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 모든 조사 결과에 따르면 유럽(혹은 놀랍게도 은행들)을 비난하는 국민보다 자기네 정부를 비난하는 국민이 훨씬 많다.

 

  결국 사회주의 정당들은 정권을 잡았을 때 유럽의 정부에 필요한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정당은 자국의자본주의(예컨대 그들의 국경 내에서 운영되는 회사 혹은 상당수 자국민 고용)가 강하고 경쟁력 있는 자본주의로 남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했다. 이것이 2007620일 당시 재무부 장관이던 고든 브라운Gordon Brown이 런던 시장 관저에 금융계 인사들을 불러놓고 연설하면서 마치 신용 경색이라는 대재앙이 곧 닥치기라도 할 것처럼 런던 금융계의 두드러진 업적을 치하한 이유다. 그는 역사는 이 시대를 런던의 새로운 황금기가 시작된 시대로 기록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브라운은 런던이 도쿄나 뉴욕과 경쟁에서 이겼다고 기뻐하며 영국과 영국 정부가 세계 무대와 글로벌 비즈니스에 뛰어든 점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영국이 자유무역의 개척자이면서 가장 중요한 옹호자로··· 자유 시장을 확실하게, 변함없이 믿는다고 주장했다.

 

  정치는 성격상 극도로 국가적인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좌파 정당은 우파 정당과 마찬가지로 자국 유권자들에게 응답했다. 좌파 정당은 좌파의 전통과 자국의 전통이 지닌 무게에 짓눌려 행동에 제약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저마다 자국 경제의 발전과 구조적 특성이라는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차이에 대처해야 했다.

 

  전설에서나 들었을 법한 유럽의 통합은 여전히 멀리 있다. 가장 큰 원인은 경제통합을 위해 필요한 것을 갖추기보다 EU를 확대하라는 정치적 압박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회원국이 15개국에서 27개국으로 늘었고, 2013728일에는 크로아티아가 가입했다). 유로화는 더 강도 높은 유럽의 응집력을 이끌어내지 못했으며, 2007~2008년 세계 경기 침체에 이어 EU 국가에 찾아온 유로존 위기로 유럽 통합은 더 멀어졌다.

 

  유로존 위기는 유럽에서 시작된 것도 아니고, 유로화 때문에 시작된 것도 아니었다. 유로존 위기의 출발점은 미국의 서브프라임 위기다. 서브프라임 사태는 리먼브러더스(Lehman Brothers : 미국에서 네 번째로 큰 투자은행) 파산과 연방정부의 AIG(최대의 손해보험 회사) 긴급 구제로 이어졌다. 이 같은 위기가 유럽의 금융 체제에 그대로 전염되는바람에 여러 국가가 자국 은행에 추가로 자금을 빌려줘야 했다. 뒤이어 실시된 긴축정책으로 유럽(EU 회원국이 아닌 영국과 아이슬란드 같은 나라도 포함)의 분열이 심해졌다. 경제성장은 사회민주주의에 도움이 되었지만, 긴축정책과 그에 따른 공공 지출·공공 부문 축소로 좌파 정당들의 한숨 소리는 더욱 커졌다. 정권을 잡은 좌파 정당은 부자들에게 불리한 정책이 아니라 자신들을 지지하는 계층에 불리한 정책을 추진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반면 정권을 잡지 못한 좌파 정당은 극우 정당이 사용하는 대중 영합적 방법으로는 지지층을 결집할 수 없었다.

 

  유로존 위기를 계기로 EU 각국에서 새로운 차이점이 드러났다. 그것은 (국가들이 지역 차를 억제하려고 노력했고 종종 성공하기도 했듯이) 오직 중앙 권력이 제거할 수 있는 차이점이었다. 새롭게 드러난 것 말고 더 오래된 차이점도 있었다. 노동계급의 규모는 어느 나라에서나 줄어들고 있었다고 치더라도 탈산업화 정도가 나라마다 크게 달랐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스웨덴과 영국은 독일과 오스트리아보다 산업 공동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스페인의 실업률은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항상 높았다. 영국의 국내외 투자 규모는 이탈리아의 국내외 투자 규모보다 월등히 컸다. 복지 비용 감축 반대는 영국보다 프랑스와 독일(반대하는 방식은 달랐지만)에서 훨씬 거셌다.

 

  각종 사회지표를 보면 그밖에도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영국에서는 이혼율과 가정 해체 비율이 월등히 높았다.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의 인구 증가율은 다른 나라에 비해 낮았다. 이탈리아는 여성 노동인구가 다른 나라보다 적었다. 영국은 시간제 일자리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와 비숙련 노동자)가 프랑스보다 많았다. 리투아니아의 살인 사건 발생률은 이웃 나라인 핀란드의 세 배, 스웨덴의 여섯 배에 달했다. 벨기에의 살인 사건 발생률도 오스트리아의 세 배에 달했다. 생태학은 프랑스나 스페인보다 독일과 스웨덴 정치에서 훨씬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페미니즘은 동유럽보다 서유럽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지난 30년간 자유 시장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유럽 주요 국가에서 채택한 자본주의 규제 모델, 국가적 케인스주의national-Keynesianism종식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거둔 이데올로기적 성공은 이례적이었다. ‘국가적 케인스주의는 국제수지나 금리, 가격, 성장과 고용 같은 주요 경제 변수를 결정할 때 국가의 경제정책이 비교적 효과적일 수 있다고 가정했다. 나라마다 다른 전통과 경제적 상황, 정반대 사회구조나 문화적 차이는 고려하지 않은 채 세계의 모든 국가가 노동시장 규제를 철폐하고, 관세를 낮추거나 없애고, 국유재산을 민영화하고, 보조금을 없애고, 가능한 한 시장이 자유롭게 돌아가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국제적인 통신망은 대체로 서방에서 발명했지만, 그것이 미치는 범위는 서방을 넘어 전 세계로 확대됐다. 소비 패턴은 급속도로 국제화됐다. 유사한 패스트푸드와 의류, TV프로그램을 뉴델리, 도쿄, 로마, 파리, 모스크바, 카이로에서 먹고 입고 볼 수 있다. 인터넷이 눈부시게 발전함에 따라 거리는 더 짧아지고 커뮤니케이션은 더 쉬워졌다. 과거에는 생각할 수 없던 지구적 규모의 거대 서사가 자리 잡았다. 이 거대 서사는 좌파가 들려주던 진보와 180도 다른 진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좌파는 계몽주의 시대의 진정한 계승자가 사회주의라고 말했다. 부를 분배하고 경제를 조직하는 합리적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민주주의가 해야 할 일이 완벽하게 끝날 것이라고 했다. 이런 생각에 반대하며 좌파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계몽주의 반대 세력 혹은 반동 세력으로 몰렸다.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가면을 쓰고 과거의 특권을 보호하려는 세력으로 분류됐다.

 

  그러나 새롭게 등장한 거대한 신자유주의 서사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줬다. 신자유주의 서사에 따르면 세계시장은 전례 없이 개인이 자유로운 시대를 열고 있었다. 국가는 규칙과 규제를 통해 개인의 자유를 억제하는 존재였다. 국가는 기업과 혁신, 개인의 노력에 세금을 부과했다. 사회주의는 어떤 형태가 됐든 전부 패배했고, 패배하는 게 당연했다. 사회주의는 예나 지금이나 지나치게 자유를 제한하고 국가 통제주의적이며 독단적이기 때문이다. 또 비능률적인 것에 보상해주고, 자주적인 계획은 처벌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서사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여전히 민족국가에 굳건히 기반을 두고 있는데, 이제 민족국가는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국가의 영토를 지키는 정도 외에는 별로 쓸모가 없다. 어떤 세력도 자유롭게 작동하는 세계시장의 힘에 도전하기는 버거워 보인다. 국제적인 대항 세력보다는 다시 고개를 드는 민족주의나 다양한 종교적 근본주의처럼 소수 지역적 반발 세력이 자본의 계속적인 승리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물론 2007~2008년에 시작된 세계적인 경기 침체와 그에 따른 글로벌 경제 위기가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부활과 신자유주의의 포기로 이어질 거라고 단정하기는 아직 이르다. 선거와 정치에서 사회민주주의 지지가 정점을 찍은 뒤 10년 동안 경제적으로 가장 튼튼한 국가에서도 복지국가와 재분배라는 측면에 별 진전이 없는 것을 봐도 그렇다. 진전은커녕 오히려 후퇴했다.

 

  이런 상황은 오늘날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불길하고 실망스러운 조짐이다. 또 은행과 보험회사의 파산이나 터무니없이 많은 상여금을 받은 무능한 금융가들 때문에 규제 완화를 지지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이데올로기적으로 패배했다고 받아들여진 점을 생각하면 이런 불길한 조짐은 의외로 여겨질 수 있다. 2007~2008년 신용 경색 이후 국영화와 국가 개입의 물결이 신자유주의자들에게 굴욕감을 안겨 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컨대 조지 W. 부시의 미국 정부가 미국 은행 시스템의 최대 주주로 변신한 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었다. 한때 신이라고 칭송받던 신자유주의자들은 그들의 부당한 탐욕이 드러나면서 더 큰 굴욕을 당했다. 특히 만인의 구경거리로 전락한 리먼브러더스 리처드 펄드Richard Fuld 회장이 그랬다. 그는 1993~2007년 자신의 회사에서 겨우’ 35000만 달러를 상여금으로 받았다고 인정했다(그가 상여금으로 5억 달러를 받았다는 비난은 옳지 않다). 시간당 임금으로 환산하면 1만 달러가 훌쩍 넘는 액수다(20097월 미국의 시간당 최저 임금은 7달러 50센트였다). 그 많은 상여금을 받은 펄드의 주요 업적이 리먼브러더스를 유사 이래 최대 규모의 기업 파산으로 몰고 간 것이었다. 자산이 6300억 달러(남아메리카의 부국 아르헨티나 GDP보다 많은 액수)에 달하던 기업이 2008년 하반기엔 전혀 값어치 없는 기업으로 몰락했다. 미국에서 신자유주의 국가 붕괴에 따른 수혜자는 버락 오바마 인지도 모른다. 루스벨트Fraklin Delano Roosevelt 이후 가장 좌파성향이 강한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기 때문이다(그렇다고 오바마의 적들, 그중에서도 하원 원내 대표 존 베이너John Boehner2009227일에 주장했듯이 오바마가 새로운 미국식 사회주의 실험을 지지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다른 쪽에서 걱정거리가 터지고 있다. 상당한 지지를 받던 외국인 혐오적인 우파 정당들이 갈수록 강력해져서 골칫거리다. 반면 좌파의 상황은 갈수록 우울해지고 있다. 2013년 말 현재 유럽에 남은 사회주의 정부는 거의 없다. 1999년과 비교하면 천양지차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올랑드François Hollande 정부처럼 아직까지 남은 사회주의 정부도 승리한 직후 국민의 거센 반감에 직면했다. 올랑드 대통령은 당선된 지 6개월이 지난 2012년 지지율 36퍼센트로 2007년 니콜라 사르코지Nicolas Sarkozy의 당선 6개월 뒤 지지율 53퍼센트 기록을 깨고 재임 중에 가장 인기 없는 프랑스 대통령이 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누가 봐도 명백하던 베를루스코니의 몰락이 일시적이었음이 드러났다. 그가 사임하자 통화주의 경제학자 마리오 몬티Mario Monti를 총리로 한 기술 관료 정부가 정권을 잡았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몬티 정부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20132월 선거에서 몬티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만으로 득을 본 것은 이탈리아 좌파가 아니었다. 오히려 베페 그릴로Beppe Grillo가 이끄는 반정치적서민 정당 오성운동M5S이 놀라운 약진을 보였다. 베페 그릴로의 이념적 지평이 모호하고 불분명한데도 그랬다.

 

  많은 사람들이 1929년 대공황과 비교하는 세계적인 경기 침체는 사회주의 부활을 위한 도약대가 되기는커녕 자본주의의 승리를 재확인하게 해줬다. 흔들리는 사회 체계를 모든 사람이 한마음으로 지켜내려고 할 때 비로 그 사회 체계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다고 말할 수 있다. 어느 나라나 중앙의 정치 세력은 체제를 지키는 데 몰두한다. 베이징, 워싱턴, 런던, 파리, 베를린의 좌파와 우파는 자본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데 이해를 같이했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종말이 모든 이에게 재앙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좌파 진영에서도 자본주의의 믿을 만한 대안이 자본주의의 폐허 위에 일어설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구멍이 나서 물이 새는 자본주의라는 배를 되도록 흔들지 않으려고 했고, 배를 다시 띄울 방법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와 미래의 성공이 오직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경제력이나 정치적 관습, 노동과 자본의 힘 대결들 다양한 원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노동은 자본보다 힘이 약했다.

 

  처음에는 세계적인 경기 침체가 신자유주의의 근본적인 패배로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경기 침체에 따른 최초의 충격 이후 신자유주의는 몸을 살짝 낮추고 겸손한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금세 기력을 회복했다. 자기비판의 조짐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신자유주의는 자기 과신을 앞세워 국가 개입과 공공 부문에 공격을 재개했다.

 

  여전히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직면한 어려움은 이것이다. 즉 그들은 자본주의와 경제성장, 그것이 줄 수 있는 번영이 필요하지만, 자본주의는 사회주의자가 필요하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는 미국처럼 일부 소수집단을 보호하거나 일본처럼 대기업과 가정, 친목 집단 같은 시민사회 조직에 복지 활동을 맡기기만 해도 경제적으로 지속 가능한 방법으로 조직될 수 있다. 게다가 사회주의 지도자들과 지지자들은 갈수록 자신을 사회주의라는 용어와 동일시하기를 꺼린다. 지지자들이 동일시하는 데 난색을 표하는 이데올로기는 장기간 살아남을 수 없다.

 

  사회민주주의가 붙들고 있는 마지막 의제는 유럽 사회 모델을 방어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제 주로 방어적인 행동이다. ‘유럽 사회 모델방어의 성공 여부는 세계적인 경제 위기의 전개 양상과 유럽에서 떠나가는 제조업이 미칠 장기적인 영향에 달렸다. 지난 수년 동안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노동계급 사이의 고리가 헐거워졌다지만, 과거 전통적인 사회주의적 요구와 지속성을 상당 부분 유지하기 위해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여전히 조직적 노동운동(노동조합)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요즘 유럽 노동조합은 힘이 없다. 특히 공공 부문 노조가 그렇다. 게다가 유럽의 산업 노동자 규모는 19세기 이후 최저 수준이다. 노조 조직률(노동자와 종업원 중에서 노조원의 비율)은 크게 떨어지지 않았으나, 추세는 의심할 여지없이 줄어들고 있다.

 

노동조합 조직율

 

 

 

 

 

 

 

 

단위 : %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1980

34.8

18.2

49.5

49.7

1999

25.3

8.1

35.4

30.1

2003

23.0

7.9

33.6

29.5

2011

18.4

7.5

35.1

25.8

 

 

 

출처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스웨덴과 덴마크의 노조 조직률은 (비록 하향추세지만) 위 표에 있는 네 나라보다 높다. 이는 스칸디나비아 모델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높은 노조 조직률도 크게 위안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노조원 다수가 공공 부문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 대 자본가의 구도가 아니라 노동자 대 고용주인 국가의 구도가 되었다. 2010년 영국에서 공공 부문 노조 조직률은 56.3퍼센트인 데 비해 민간 부문 노조 조직률은 14.2퍼센트에 불과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국제 환경은 복지국가가 살아남는 데 적대적인 쪽으로 조성될 전망이다. 상황이 이러니 좌파의 방어적 전략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시장의 힘을 규제하되, 국가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선까지 규제해서는 안 된다. 공공 지출은 억제되어야 한다. 특히 금융 체계를 살려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 국가 재원이 고갈된 이후의 공공 지출은 억제되어야 한다. 복지국가를 수호할 수는 있지만 확대해서는 안 된다. 민영화가 바람직할 수도 있다. 평등은 여전히 매력적인 목표지만 선거를 고려해서 목표를 완화할 수 있다. 모든 국제적 논의의 장에서 말로는 조정이 필요하다고 얘기하지만, 국제 금융기관의 권한은 축소될리 없다.

 

  좌파의 부진과 그들의 소박한 목표가 더욱 의외인 이유는, 대다수 여론조사에서 유럽인 절대다수(70퍼센트 이상)가 빈부 격차가 늘었고, 현재의 경제 제도가 부자에게 유리하며, 불평등이 심각한 문제라고 답했기 때문이다. 이런 정서를 이용할 능력이 없는지, 의지가 없는지 모르겠으나 좌파의 전망은 암울하다. 좌파 정당들은 수세에 몰린 채 새로운 비전을 거의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방어 전략은 일시적일 때만 통한다. 정치의 핵심은 이기는 것이지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다.


도널드 서순, "사회주의 100년 - 20세기 서유럽 좌파 정당의 흥망성쇠", 강주헌 외 4인 옮김, 황소걸음, 2014
Donald Sasoon, "One Hundred Years of Socialism: The West European Left in the Twentieth Century",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