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역사

[발췌] 대처리즘의 문화정치

planet2 2010. 5. 9. 06:40

스튜어트 홀, "대처리즘의 문화정치", 임영호 옮김, 한나래, 2007
Stuart Hall, "The Hard Road to Renewal : Thatcherism and the Crisis of the Left", Verso Books, 1988


이데올로기적으로 대처리즘은 '자유 시장'과 경제인이라는 자유주의 담론과 전통, 가족, 국가, 명예, 가부장주의와 질서 등의 유기적 보수주의의 주제를 결합해 새로운 담론 접합체를 만들어낸 것으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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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일반적으로 말해, 또 수많은 명예로운 예외들을 제쳐두고 보면 좌파의 정치분석은 가엾을 정도로 빈약하며, 이데올로기적 분석은 어느 편이냐 하면 더 열악한 상태에 있다. 이 둘은 인습에 사로잡힌 채 이루어지고 있어, 오늘날의 사태 진전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정치적 · 이데올로기적 심급이라 부를 만한 것들이 작용하는 구체성이나 현실적 효과를 전혀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는 좌파가 멍청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통 마르크스주의든 경제주의적 변종들이든 모든 좌파가 매우 환원론적인 정치, 이데올로기 관념을 고수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원론적인 관념에 따르면 '최후의 심급에서 in the last instance' (그것이 언제이든) 정치와 이데올로기는 모두 일종의 (흔히 잘못 정의된) '경제적' 혹은 '계급' 결정론이라는 개념에 의해 결정되고, 따라서 거기서 바로 '읽어 낼' 수 있다. 그런데 이 사고는 새로운 지형을 열어 우리가 지금까지 모르던 것을 알려줄 만한 이론적 작업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 그보다는 우리가 항상, 여하튼 진실이라 믿던 것이 옳음을 점점 더 뚜렷이 확인해 주는 것 같다. 즉 그것은 스스로 확증하는 일종의 순환 논법의 산물이나 이론적 헛수고이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유물론'을 가장하고 저공비행하는 경제주의의 오래 전해오는 습속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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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진짜 문제는 '계급' 개념을 사용할 것인지가 아니라 이 용어가 실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며 그 용어가 전하고자 하는 (또 전할 수 없는)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아주 분명하고 부인할 수 없는 방식으로 대처리즘이 의미하는 전체적인 요지는, 자본제 시장 방식의 해결책을 위한 길을 마련하고 소유권과 채산성의 특권을 복원시키며, 자본이 좀 더 효율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정치적 여건을 부활시키며 (대처리즘의) 에토스와 가치로 시종 넘쳐나 (대처리즘을) 지지하는 문화를 (대처리즘의) 과업 주변에 조성하는 것이다. 대처리즘은 '금전적 가치'외에는 좋은 삶에 대한 다른 어떤 척도도 알지 못한다. 대처리즘은 '자유 시장'의 힘 외에는 어떤 다른 요인이나 동기도 문명을 규정하는데 설득력이 있다고 보지 않기에, 자유 시장을 마치 성서에 나오는 바리새인처럼 위선의 망투로 포장하느라 바쁘다. 오늘날의 신공리주의자들 New Utilitarians 에 대해 우리는 마르크스가 한때 제레미 벤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 볼 수 있다. 즉 벤담은 "현대의 상점 주인, 특히 영국의 상점 주인을 정상인으로 설정한다. 이 의심스러운 정상인과 그의 세계에 유용하다면 어떤 것이든 절대적으로 유용하다. 그리고 그는 이 척도를 과거, 현재, 미래에 모두 적용한다." 대처리즘은 자본가와 기업가 계급을 '기업 문화 enterprise culture'의 신성한 담당자이자 도덕적 양심의 수호자이며, 무엇보다도 우리 교육 체제의 후견인으로 승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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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리즘의 '포퓰리즘 populism'은 왜 예측과 달리 대처리즘이 자신의 프로젝트에 일정한 대중적 불만 세력을 결속시키고 사회 내에 다양한 분파를 조정하고 결집할 수 있으며, 대중적 경험의 일정한 측면과 연결 지을 수 있는지 예견해 준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대처리즘은 분명히 일반 대중 대다수의 가슴과 정신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처리즘이 대중의 사고와 경험의 내부 '논리'에 작용하면서도 그곳에 뿌리 내리지 못하는 '외부적'세력에 그친 것은 분명히 아닌 것 같다. 대처리즘을 특징짓는 일정한 사고, 감정, 계산 방식은 하나의 물질적, 이데올로기적 세력으로서 일반 대중의 일상 생활에 스며들었다. 대처리즘이 '미약한 민중의 편에 서서 거대한 세력에 맞서고 있는' 것처럼 내세우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는지 우리는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대처리즘은 어느 정도는 자신을 단순히 '그들' 중 하나가 아니라 당황스럽게도 '우리들'의 일부로 만들었다. 대처리즘은 '일부 민중들이 실제로 원하는 것'과 입장을 함께 하면서도 동시에 권력 블록을 통해 그들을 계속 지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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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리즘이란 상당 부분 상식의 재구성에 관한 것이다. 즉 대처리즘의 목적은 '이 시대의 상식'이 되는 것이다. 상식은 평범하고 실제적이며, 일상적인 계산 방식의 틀을 형성하며, 마치 우리가 숨쉬는 공기처럼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것은 실제와 사고에서 그냥 '당연시'되고 모든 대화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는 결코 검토나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을 이루며 모든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가정하는 전제가 된다. 스스로 역사에서 벗어나 자연의 영역으로 자연화하고, 그리하여 드러나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은 모든 이데올로기가 꿈꾸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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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리즘은 이미 정해진 통합적인 세계관을 사람들에게 주입할 수 있다고 전제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이질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서로 분산된 수많은 의지들'을 함께 결합하는 형성 과정에 의히 이것이 달성된다고 대처리즘은 가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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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란 것은 없으며, 개인과 그들의 가족만 존재한다"는 대처 여사의 주장에 대항해 (노동당이) 내세울 만한 '공'개념이나 사회적 '선', 아니 더 나아가 '사회'라는 개념 자체는 무엇인가? 왜냐하면 (오래된 집단주의로 되돌아가는 것도 불가능하고 새로운 개인주의를 천박하게 추종하는 일도 불가능한 마당에) 그러한 개념이 없다면, 붕괴되고 있는 사회 질서를 복원하기 위해 필요한 수준의 공적 세금을 부과하거나 부와 재산, 권력의 재분배를 추진하려는 대중의 의지를 조성할 수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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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처리즘이 차지한 세계와 전혀 다른 세상을 장악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대처리즘과 똑같은 세상을 점유하고 거기에서 다른 형태의 사회를 건설할 때에만 좌파의 프로젝트를 혁신할 수 있다. 그람시가 말했듯이 "만일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고 작동하는 세력들간의 새로운 균형을 조성하는 데 자신의 의지를 바친다면 …… 우리는 여전히 영향력 있는 현실의 지형 안에서 움직이지만 그 현실을 지배하고 초월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셈이다 …… '반드시 실현되어야 하는 당위성'은 그러므로 구체적인 것이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유일하게 현실적인 …… 해석이고, 그것만이 주체적으로 만들어가는 역사이자 능동적으로 만들어가는 철학이며, 그것만이 정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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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리즘의 승리는 어떤 지지의 일시적인 등락에 근거하는 게 아니라, 영국의 정치 지형도를 계속 바꾸어놓고 있던 근본적인 움직임과 경향을 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지금 좌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점은 구조적이고 유기적인 것이다. 여기에 대한 한 가지 단서는 지난 5년간 지속된 추세 속에 있다. 어떤 정책을 지지하는가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주목할 만한 다수는 실업, 보건, 주택, 교육 등 (즉 '복지' 관련 쟁점들)에서는 노동당을 일관되게 선호한다고 밝혔다. 캠페인 기간 내내 이것들은 투표한 대다수 유권자들에게 계속해서 가장 중요한 쟁점들이었다. 노동당은 실제로 이것들을 정치적 의제로 올려놓는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선거 전과 선거 기간 중에 모두 이미지에 관한 질문 (누가 '잘하고 있는지', '이 나라에 모범을 보이는지', '사람들에게 '영국인임을 다시 뿌듯하게 느끼게' 만들고 있는지')을 받으면 대다수는 일관되게 '메기'[대체 - 옮긴이] 라고 말했다. 똑같은 일이 미국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 이 추세를 해석하는 한 가지 방식은 점차 유권자의 정치적 사고가 정책이 아니라 이미지의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정책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정책들은 사람들이 일체감을 느끼는 이미지 속으로 구축되지 않으면 사람들의 정치적 상상력을 장악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유권자의 비합리성을 보여 주는 징후는 결코 아니다. 영국과 미국처럼 선진 '계급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 방향으로 가는 추세가 생겨날 수 밖에 없는 데에는 아주 '합리적인' 이유가 많이 있다.

첫째, 결정들이 복잡하면서도 우리와 요원하며, 국가의 거대 관료제와 시장 통제가 사회적 삶의 절대적으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책 문제에서 세부 사항에 개입해봐야 성공할 희망이 별로 없으며 경제나 정책 기구의 최종적인 조율에도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믿는데, 이는 아주 '합리적인' 것이다.

둘째, 유권자층은 미디어의 끊임없는 회유적 자극과 정치인들의 '정보 조작'에 지금 무자비하게 노출되어 있다. 정치 역시 이러한 인상 관리 게임 속에 흡수된다고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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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여건 속에서 국민은 시민으로서 자신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것은 단지 어떤 시나리오나 이미지 중의 하나에 대해 모호하고 비정형화된 '선호'를 표현하는 일이라고 상상하는데, 이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정치가 사소함으로 전락한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이미지는 사소한 것이 아니다. 이미지 속에서 또 이미지를 통해 근본적인 정치적 문제들이 제기되고 입증된다. 우리는 현재 우리가 하는 것보다 이것들을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대처 여사는 자신이 단지 권력을 위해 싸우지 않고 '21세기 의제 설정'에 기여하고 있어 기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폭넓은 이미지의 측면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영국과 영국 국민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 도대체 어떻게 논의할 수 있겠는가? 미래는 상상되어야 하며, 새로운 말을 지어내자면 '이미지화'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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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정치는 - 사실은 모든 종류 정치가 - 정치적 정체성과 동일시에 의존한다. 사람들은 동일시를 상징적으로, 즉 자신들의 정치적 상상력 속에서 사회적 심상을 통해 수행한다. 이들은 어떤 한 종류나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자신을 본다.' 이들은 어떤 한 시나리오나 다른 시나리오 안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상상한다.' 이들은 그냥 자신들의 이른바 '물질적 이해 관계'가 얼마나 걸려 있나 하는 측면에서만 투표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다. 물질적 이해 관계는 엄청나게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들은 항상 이데올로기 적으로 정의된다.

특정한 버전의 마르크스주의는 이른바 '골수 좌파'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처럼 노동당의 '중심'을 아직도 강력하게 장악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물질적 이해 관계 자체는 아무런 필연적인 계급 소속성도 갖고 있지 않다. 이들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이것들은 정치적인 이데올로기 스펙트럼 안에서 정해진 목적지인 '제자리에' 사람들을 자동적으로 실어나르는 에스컬레이터가 아니다.

이렇게 안 되는 한 가지 이유는, 때로는 서로 갈등하기도 하는 정체성을 반영하는 서로 갈등하는 사회적 이해 관계들을 사람들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로서 어떤 사람은 '임금'을 최우선시할지도 모른다. 실업률이 높은 시기에는 '직업 안정성'의 우선 순위가 높아질 것이다. 여성이라면 '자녀 양육'을 더 중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취업 여성'은 무엇을 우선할까? 이 여성의 정체성 중 어느 쪽이 그녀의 정치적 선택을 결정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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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대처가 이끄는 영국에서 사태가 더 어려워지고 경쟁이 더 치열해질수록 사회는 더 분열된다. 그리고 사회가 더 분열될수록 이 이데올로기 갈등들은 민중의 실제 삶에 압박을 가하여 이들의 '자연스런' 사회적, 정치적 정체성을 두 동강 내놓는다. 빈곤이나 실업이나 혜택 박탈의 '현실적 경험'에 호소한다고 해서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할 것이다. 심지어 빈곤과 실업조차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어떤 젊은 실업자는 이 경험을 열심히 일하고 투표해서 체제를 바꾸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은 명제를 시사하는 신호로 규정될 수도 있다. 즉 승자에게 모든 운을 걸고 대세에 편승해서, 쉽게 돈을 벌고, '최고'를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질적 이해 자체는 이번에는 노동당에게 노동 계급의 다수를 자동적으로 보장해 주지 못했다. 그리고 이는 그러한 보장을 결코 해준 적이 없기 때문에, 앞으로도 반드시 그리 하지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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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는 이른바 '현실적' 다수파만이 아니라 (이와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상징적 다수파'에 따라 이기기도 지기도 한다. 대처 여사의 '상징적 다수파'에는 미래의 방식으로서 기업 문화와 이데올로기적으로 동질성을 느끼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자신들의 정치적 상상 속에서 다음 번에도 자신들이 운이 좋을 것 같다고 보는 사람들도 포함된다. 이들은 대처리즘의 정치 프로젝트를 둘러싸고 '상상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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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은 '공정한 몫,' 재분배의 전선에서는 확신을 얻었을지 모르나, '부의 창출'이라는 전선에서는 신뢰성을 얻지 못했다. 이는 부유한 국가라면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이는 어떻게 조성될 수 있는지에 관해 그림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리고 사회적 부가 아니라 '가족의 재산'이라는 측면에서 정체성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대처리즘의 개인화되고 사유화된 '번영' 이미지에 대항해 제시할 이미지를 전혀 갖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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