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역사

혁명 만세!?

planet2 2010. 2. 10. 04:15

그러니까 자코뱅의 몰락이 공포에서 평화로의 이행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첫번째 사실은, 바로 그날, 단 하루 만에 로베스피에르 및 그의 동료 70명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으니 이는 혁명 전 기간을 통틀어 최고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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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옹에서는 자코뱅 당원 300명을 창고에 몰아넣고 불을 질러 죽이는 만행이 벌어졌다. 혁명성지 판테온에 안치되어 있던 마라의 유해는 버려졌다. 코뮌은 제 기능을 박탈당했고, 가난한 유권자들을 배제하는 선거법 개정이 이뤄졌다. 음식 값 상한제가 철폐된 탓에 기근이 벌어지자, 신정부를 지지하던 한 신문은 이렇게 썼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얼굴들은 죄다 수척하고 창백하다. 고통과 피곤함, 패고픔과 피로의 기색이 역력한 얼굴들이다." 가격상한제 법으로 돌아가자는 상퀼로트들의 봉기가 몇 차례 실패로 돌아간 뒤, 자코뱅 지지자들에 대한 대학살이 잇따랐다. 한 의원의 말이다.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목을 베는 장면들이 보였다." (프랑스 남동부의)타라스콩에서는 자코뱅 당원들을 강물에 던져넣었고, 지방 귀족들은 이를 보며 박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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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뱅은 몰락 이후 단두대에서 희생되었을 뿐만 아니라 역사에 의해서도 '선택적 탄식 신드롬'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상태에 빠진 사람들은 어떤 특정 사건에 대해서는 엄청난 공포를 느끼면서도 다른 곳에서 벌어진 엇비슷한 사건에 대해서는 희한하게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다는 것. 이 신드롬이 가장 극명하게 확인된 경우는 아마 2001년 뉴욕의 9/11 사태일 것이다.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지는 걸 보고 비탄에 잠긴 수많은 정치가와 언론인들이 실은 체첸에서 5만의 민간인이 죽어도, 니카라과에서 수만이 희생되어도, 레바논 수용소에서 1,800명이 살육된 사건 (이스라엘의 아리엘 샤론이 '대략적 책임자'로 지목된)에 대해서도, 꿋꿋이 평상심을 유지하던 이들이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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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수호자를 자처한 사람들이 난처했던 건, 사건이 하나씩 터질 때마다 점점 더 소름 끼치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던 거다. 그들을 비난하고 그들이 선택한 길이 틀렸다고 지적할 수는 있지만, 대체 어느 지점에서 그들이 손을 털어야 했단 말인가? 애당초 왕의 부당한 절대권력에 반기를 들지 말았어야 옳았다는 건가? 일단 시작한 이상 꼴사나운 혁명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아니면, 그들은 국왕이 제3신분을 쫓아내라고 군대를 보냈을 때 물러났어야 했나? 아니면, 국왕이 도망가려고 했을 때 싹 다 포기해야 했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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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의 참모였던 저우언라이는 프랑스대혁명에 대해 아주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 혁명의 파급효과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걸 얘기하기엔 너무 일러요." 그럴듯하지 않은가? 당시 혁명가들이 맞서 싸웠던 것들과의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크 스틸, "혁명만세", 박유안 옮김, 바람구두, 2008]
(Mark Steel, "Vive La Revolution", 2003)


지난 해 추석, '이번 만큼은 연휴를 알차게 보내자'는 다짐을 하고 집에서 배깔고 책만 볼 요량으로 책을 디립따 사놨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이 못말리는 게으름을 도대체 어찌 해야 할꼬... 아무튼 '뭐 한 것도 없는데 정신차려보니 다 지나가버린 연휴'를 보내며 그나마 건진 건 아다치 미츠루의 "크로스 게임"과 이 책 "혁명만세".

그동안 프랑스대혁명에 관해선, "현대 민주주의의 성립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자코뱅이라는 꽉막힌 꼴통집단의 무차별적 폭력으로 인해 비극으로 끝난 사건"으로만 알고 있었다. 단두대와 잘린 머리, 성난 군중으로 대표되는 공포와 혼란의 이미지들을 같이 떠올리며... 세계사 수업에서 배운 것과 미디어에 의해 주입된 이미지 너머의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 이 책을 읽고 그러한 내 인식이 안이했음을 깨달았다.

저자인 마크 스틸은 영국의 코미디언이자 사회주의노동자당 (Socialist Workers Party)의 당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좌파 코미디언이 쓴 책 답게 이 책엔 유머와 신랄함이 넘쳐 흐른다. 혁명이 진행되는 수년 간의 과정을 시트콤 에피소드처럼 짧은 호흡으로 농담과 빈정거림을 버무려 서술하기 때문에 술술 잘 읽힌다. 냉소적인 농담들과 함깨 현대의 영화와 음악, 미디어의 행태, 저자의 경험담 등을 활용해 당시와 지금을 연결하고 풍자하는 방식이 내 취향엔 딱 맞아서 매우 재미있었다. 뿐만 아니라 키들거리며 읽어나갔는데도 어느새 프랑스혁명에 관한 내 지식의 지평도 넓어졌다.

사드 후작이라는 '변태'의 이름은 들었었지만 그 양반이 혁명과도 끈적하게 얽혀있었다는 건, '혁명은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는 말은 들었었지만 아일랜드와 아이티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건, 자코뱅이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는 말은 익히 들었었지만 그들이 몰살 당했다는 건 누구로부터도 듣지 못했었는데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급진적 좌파인사가 쓴 책이니 급진적 혁명세력을 옹호하고 우익의 프로파간다를 반박하는 것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혁명과 혁명가들을 고리타분하게 미화하지는 않는다.

프랑스혁명에 관해 교과서 이상의 것을 알고 싶어하는 진보적 성향의 분들에게 입문서로써 추천!





+

여기까지만 쓰고 말려고 했는데 어쩌다 생각이 '혁명'이라는 것에까지 미쳤다. 이제는 좌파 내부에서도 소수가 되어버린듯 하지만 여전히 일부 좌파인사들은 상사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혁명이라는 단어를 붙들고 있고, 어떤 이들은 좌파가 뭔 말만하면 '혁명을 꿈꾼다'고 다그치며 공상적이고 폭력적이라고 비난하는데 이걸 과연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역사 지식도 일천한 일개 찌찔블로거가 그걸 규정할 수는 없고.

다시 혁명을 꿈꿀 수 있을까 - 이재영, 레디앙
폭력혁명과 급진개혁을 넘어 - 이재영, 레디앙

저 글의 박노자, 이재영, 장석준의 의견에 두루 공감한다. 박노자는 혁명을 자연현상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동의한다. 비가 기우제를 지낸다고 내리고, 홍수날 것 같으니까 그만 내리라고 하면 그치는 것이 아니듯 혁명도 마찬가지다. 장차 있을 지 없을 지 알 수 없고, 발생한다고해도 통제는 불가능한데 후유증은 격심한 그런 걸 굳이 기원할 필요도 문제해결의 답으로 여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호들갑을 떨며 적대할 필요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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