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역사

민주화라는 이름의 허상

planet2 2014. 2. 5. 18:49


정말이지 요새 '민주화'라는 구호처럼 신경을 건드리는 말도 없다. 우선 무엇이든지 제법 가지거나 꽤나 내세울 게 있는 사람들에게 민주화라는 화상(畵像)이 기존의 모든 질서를 싸그리 뒤엎고 지금까지 누려온 이익을 송두리째 뺏어가려는 사탄처럼 생각되기 일쑤일 터이고, 반대로 수중에 지니거나 별로 앞세울 게 없는 사람들로서는 그 민주화가 소리만 요란했지 무엇 하나 구체적으로 내놓은 것이 없는, 이를테면 말로만 배부를 허깨비가 아니냐고 의심하기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화란 적어도 당분간은 이 양쪽 모두에게서 원망의 대상이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을 듯하다.

 민주화가 이런 서운한 대접을 받게 되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없지 않다. 그 하나는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포괄되는 갖가지 내용들에 대해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예컨대 임금인상의 요구까지는 그 신물나는 민주화에의 요망사항으로 눈을 감아 주던 자본가들도,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 노조의 정치참여라든가 혹은 좀더 무게 나가는 '화끈한' 주장을 펴게 되면 대끔 그것을 단순한 민주화의 문제가 아닌 체제 파괴의 음모라고 눈을 부라린다. 반대로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면 더 이상 이대로는 못 살겠기에 좀더 나누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일 뿐인데, 거기에 무슨 얼어죽을 놈의 민주화를 끌어대느냐고 역정을 부리며 민주화란 더 치열하고 더 거창한 그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 거리를 어떻게 좁히고, 그 차이를 어떻게 다듬어서 민주화의 내용을 설정하느냐는 문제는 그 민주화를 어떻게 실현해야 하느냐는 과제와 연관지어 생각할 때 아주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다른 하나는 민주화가 수용하고 있는 그 다양한 요구에 대한 평가에 아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야겠다. 예컨대 교직원노조의 결성을 놓고 정부는 이것이 아주 불순한 동기로 태동된 사회의 독소이기 때문에 이 나라 교육의 장래를 위해 결코 방치해서는 안 되고, 따라서 그 주동자들을 무자비하게 때려잡거나 -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수백만의 제자들과 수천만의 학부모들 앞에 마치 흉악한 범죄자를 엮어가듯 그토록 난폭하게 잡아갈 수 있단 말인가 - 철저하게 가두어 두어야 한다고 굳게 결심하고 있다. 반대로 교직원노조의 추진자들은 분명히 자신의 손으로도 가르쳤었을 그 새파란 전경들에게 무지막지하게 멱살이 잡히고, 그들의 구두발에 짓밟히는 수모를 당해가면서도, 이것이야말로 이미 오래 전에 땅에 떨어져 이제 개조차 안 물어간다는 교권을 다시 세우고 나아가 이 나라의 교육을 되살리는 유일한 방도라고 굳게 믿고 있다. 실로 여기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일은 그러한 주장의 차이가 아니라 그 차이를 교정하지 않으려는 고집과 독선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선 민주화의 내용부터 검토해보자. 사실상 민주화의 범위를 정한다는 말은 벌써 숱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데, 왜냐하면 범위의 설정 자체가 이미 어떠한 제약을 뜻하며 더구나 그러한 발상이야 말로 바로 '민주화 추진'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자유는 방종이 아니고 민주주의에는 책임이 따라야 된다는 민주시민헌장 제1조쯤에 명시되어 있음직한 이를테면 공동의 선을 위한 필요악으로써의 '제약'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민주화를 희구하는 사람들도 이 지당한 도리를 거역하자는 뜻이 아닐 것이므로 이 조목은 원천적으로 제약조건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민주화의 내용에 관한 논의와 관련해서 등장한 최초의 제약은 아무래도 '계급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여하튼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자본주의사회는 자본이 발언하는 사회이며 그래서 자본가의 말발이 가장 세게 먹히는 사회인데, 반대로 사회주의사회는 노동이 득세하는 사회이며 따라서 노동자가 주인이 된다는 사회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사회는 모든 생산체계와 거기에 기초하는 상부의 질서도 기본적으로 자본의 이해에 어긋나지 않도록 구축되었을 것이며, 그래서 어느 집단이나 세력이 이 사실을 거부하고자 할 때에는 그 기득권자가 동원하는 온갖 처절한 박해에 대해 대단한 각오와 준비를 선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계급의 문제는 사회가 계급사회로 이전한 이래로, 그리고 다시 무계급사회로 이행하기 전까지 인류의 역사를 규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 제 발로 제대로 서지 못하는 제3세계의 여러 국가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다소 새로운 형태의 제약을 감당할 준비를 갖추어야 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예속성의 문제다. 여기의 예속성이란 강대한 한 민족에 의한 약소한 다른 민족의 지배를 지적하기 때문에 이것을 '민족의 문제'라고 불러도 잘못이 없다. 자본주의는 인류가 고안해낸 어떤 제도보다도 질투가 심해서 자본주의 이외의 다른 어떤 제도와의 타협이나 공존을 거부해왔다. "나를 통하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우기는 그 우매하던 시대의 어느 종교만큼이나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다. 물론 자본주의 내부에도 비자본주의적 부문이 제법 잔존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러한 예외의 허용은 실로 이윤 극대화라는 자본주의 고유의 목적을 살려놓기 위해 의도적으로 살려놓은 미끼에 불과하다.

 여하튼 자본주의는 세계에 그 전일적인 체제의 수락을 강요하며, 이렇게 해서 일단 성립된 세계자본주의는 후발 국가들을 그 내부에 강제적으로 편입시켜 나간다. 그러므로 어느 나라가, 이를테면 한국이 그 테두리에서 잠시 벗어나서 독자적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해나가려고 한대도 그 일이 절대로 수월할 리가 없다. 실제로 자본은 웬만큼 우직한 반대쯤은 적당히 주무르고, 웬만큼 완강한 저항쯤은 간단히 퇴치하는 온갖 교활한 수법들을 모두 터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농민들이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수입 과실들이 판을 치고, 우국단체들이 아무리 악을 써도 외제 담배의 판매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우리의 현실도 그 사정의 한 단면을 잘 묘사하고 있다.

 세계자본주의의 지배와 제3세계의 반항은 흔히 외세와 반외세의 관계로 표출된다. 더구나 이른바 정통성의 결여로 국내의 지지 기반이 휘청휘청하는 정권에 대해 이 외세는 강대국의 보증을 내세워 정권의 안보를 확약하며, 그 반대 급부로 국내시장에서 단물을 빨아내는 경우가 허다한데, 그것이 어찌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뿐이겠는가? 그리고 "누구의 쌈지라도 상관없다. 다만 푼돈이라도 떨어지기만 한다면"하고 덤비는 매판자본이 여기에 끼어들게 되면 일의 매듭이 한결 복잡해진다. 우리의 경우 불행했던 과거에 대한 응어리가 아직 다 풀리지 않은 일본에 '반일'까지는 적당히 눈을 감아도, 다시 말해 민주화의 내용으로 묵인되어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과 나라와 자본주의를 지켜준(!) 미국의 심사를 거스르는 '반미'는 절대로 민주화 품목으로 용납되지 않는다.

 자본주의 일반에서의 계급이란 제약과 제3세계 일반에서의 민족이란 제약 이외의 우리의 상황에서는 체제의 제약이 추가되는데, 이것이 곧 '분단의 문제'이다. 우리에게 이 분단만큼 그 가닥을 풀기가 힘든 숙제도 없다. 왜냐하면 계급의 의미를 거론하다가는 체제라는 벽에 부딪치기 십상이고, 체제의 내용을 깊이 파다보면 거기에 으레 계급문제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민족문제의 해결은 체제의 대결과 맞물려 있고, 더구나 특정 체제에의 강요나 배격이 외세에의 의존이나 탈피라는 형식으로 표출되는 한 도대체 어디가 풀어야 할 매듭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된다. 다만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와 그 반대세력에 대한 가혹한 탄압은 그동안의 역사가 증언하고 있는데, 아무튼 그 통에 자본주의는 아무리 천민적이더라도 반드시 수호해야 하며 반대세력의 주장은 그 속에 아무리 온당한 부분이 들어 있어도 무조건 타기해야 한다는 불행한 절차가 반복되었다.

요컨대 우리의 민주화는 이와 같이 계급, 민족, 체제라는 요인에 의해 그 범위가 원천적으로 제약되어왔는데, 그것은 계급투쟁, 반외세, 분단극복 등에 대한 논의가 허용되지 않으면 민주화라는 의미 자체가 지극히 편파적으로 왜곡돼버릴 수밖에 없다는 사정을 가리킨다. 물론 이럴 경우 "그게 혁명이지 어디 민주화냐"며 펄쩍 뛰는 사람들이 적지 않겠지만, 실상 그런 혁명이 없이 민주화가 가능했던 적이 단 한번 이라도 있었는지를 곰곰 따져봐야 한다. 실로 모든 민주화는 어차피 한쪽은 빼앗고 다른 한쪽은 빼앗기는 절차라는 의미에서 본래 혁명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기본 인식에 합의가 없다면 어떤 사소한 방법론상의 다툼도 결국은 심각한 노선 투쟁으로 확대되는 위험을 안게 된다. 예컨대 점진적으로 차근차근하게 얻어내자는 이른바 온건파는 기회주의자로 몰리는 불운에 처하게 되고, 단번에 크게 얻어내려는 이른바 강경파는 스스로를 모험주의자로 모는 덫을 마련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민주화의 내용규정에도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르지만 그 내용의 평가에는 더욱더 심각한 갈등이 나타난다. 일례로 겉으로 내놓고서는 누구도 반대의 목청을 높일 수 없는 자유나 평등과 같은 기초 개념부터 검토해보자. 모두가 자유롭고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는 말씀이야 도의 교과서의 가르침이지만 사회현상의 한 꺼풀만 들추면 즉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자유? 어린 시절 우리가 이 말을 처음 깨치기 시작할 무렵부터 우리는 그 옆에 반드시 붙어다니던 '북괴'라는 또 하나의 말을 익혀야 했었다. 북괴의 남침야욕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자유는 온전할 수가 없다거나, 북괴 치하에서 살고 싶지 않거든 이 자유의 결핍 - 이런 무지막지한 개념 조립에 양해를 구한다 - 을 묵묵히 감당해야 한다는 설교를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다.

'북괴'에 대한 선악의 판단이나 그 정치적 평가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개입할 능력이 없으나, 다만 그놈의 '북괴'로 인해 이 땅의 자유가 얼마나 크게 압살당해왔는지는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다. 아마 그 '북괴'가, 그 신나는 '동네북'이, 그리고 그 편리한 '오리발'이 자취를 감추는 날 큰일났다고 보따리 싸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여하튼 자유는 우리에게 항상 북괴와 대비되어 나타났으며, 따라서 그 북괴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자행되는 모든 탄압은 항상 자유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었다. 통치자들이나 문교부 관리들이나 문화공보부 당국자들은 사람들이 자유와 북괴의 대비에 짜증을 내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거기에 민족적 민주주의니 국민교육헌장이니 하는 따위의 온갖 그럴듯한 화장을 시켜 내놓았다. 쿠데타로 합헌 정부를 뒤엎은 군인들이 내건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구호가 순진한 백성들을 얼마나 크게 현혹시켰으며, 그리고 바로 그들이 일제하 '천황폐하'의 성은에 감읍하며 읊조리던 교육칙어의 복제판을 다시 만들어 얼마나 무익한 낭비를 일삼아왔는가?

 평등이란 개념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그 의미를 경제의 영역에 적용하자면 예컨대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는 대로 받으면서도 일체 시비하지 않는 태도가 가장 평등한 태도로 간주되었다. 몫을 나누기보다는 덩치를 먼저 키워야 한다는 것이 그 명분이었지만, 덩치가 커져 몫을 나누게 될 때에는 이 명분이 쉽사리 잊혀졌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정부가 나서서 교통정리를 해야 하는데, 실상 정부의 개입은 지독히 편파적이어서 한 편의 차만 골라서 통과시키고, 다른 편의 차는 계속 통행을 금지시키는 따위의 어리석은 행위를 자행해왔다. 해마다 굶어 나자빠지는 사람이 줄을 이어도 정부는 그저 참아야 한다고 가르쳤고, 심지어는 제 몸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그어대도 정부는 일부 과격분자의 소행이라며 애써 태연하려고 했다. 임금을 좀더 올려달라는 협상의 자리에서조차 경영자 대신에 흔히 경찰이나 정보기관원이 나타나기 일쑤였고, 그들은 물론 노동법규 대신에 국가보안법 조항에 따라 사태를 처리해나갔다.

1987년 여름 6월 항쟁이란 그 초유의 '열기'의 충격으로 40여 년 동안 억눌려왔던 요구들은 해일처럼 몰려왔고 게다가 선거라는 다소 신경써야 할 절차로 인해서 집권세력은 그 신나는 공권력의 행사를 다소 자제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2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예의 그 성장의 감퇴와 수출의 둔화를 이유로 임금규제니 가이드 라인이니 하는 왕년의 그 악명 높은 전례들을 스스럼없이 다시 되풀이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말하자면 40여 년 동안의 그 절박한 불평등은 아주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2년간 시험한 평등에의 요구는 실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조지 오웰읜 소설에 등장하는 독재자에게는 적어도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고 강변하는 해학이 있었지만, 우리의 상황에선 덜 평등한 것도 어차피 팔자소관이라고 윽박지르는 장면만이 재연될 뿐이어서 살벌하기까지 하다.

 민주화의 내용에 혼선이 오고 그 평가에 시비가 따른대도, 그것이 책 속에서의 혼선이고 세미나 장에서의 시비라면 크게 문제될 게 없다. 원래 거기야 그런 데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생활 속으로 연장된다면, 다시 말해 이론만의 싸움이 아니고 현실에서 갈등과 투쟁으로 표출된다면 굿을 보며 떡을 기다리는 느긋한 심경으로 대할 수 없다. 바로 이 현실의 문제로서 먼저 꼽아야 할 사항은 경제 고유의 논리에 대한 부정이다. 예컨대 어떤 개인에게 있어서 가장 합리적인 행위 기준은 만족의 극대화이고, 어떤 기업에 있어서 최선의 경영 기준은 이윤의 극대화다. 자본주의의 운영원리는 각자가 모두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한다면 그 사회가 가장 합리적으로 조직된다는 가정 위에 근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개인이 인신매매로 돈을 모으고 어떤 기업이 마약 밀조로 돈을 버는 행위까지를 그 이익 극대화의 범위 속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새로운 시가지 건설의 정보를 미리 빼내 주민들의 땅을 슬쩍 사들인 다음 쪽박만 들려 내보내면서도 그것은 인신매매와는 다르다고 주장할 셈이며, 은행에서 태산더미 같은 빚을 내다가 증권투기에 골몰하고 토지투기에 열을 몰리는 기업들은 그 해독이 그래도 마약 밀조보다는 작다고 계속 뻔뻔스레 변명하고 나설 참인가? 아무리 기막힌 이유를 갖다 붙여도 투기는 소유권의 이전에 불과할 뿐이지 새로운 부가가치를 생산해내지 못한다. 놀부와 흥부가 각가 100원씩을 내어 생산활동을 벌이면 비록 놀부가 150원을 차지하고 흥부는 100원만 회수하는 경우가 되더라도 그 사업은 250원을 만들어내지만, 반대로 놀부가 땅투기, 집투기, 혹은 돈투기로 150원을 벌게 되면 흥부는 반드시 50원을 잃어야 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전혀 어떤 이익도 기대할 수가 없게 된다. 개인이 해도 비판받아 마땅할 짓을 기업이 나서서 하고 있다니 그것이야말로 사회를, 아니 나라를 망칠 첫 징조가 될지 모른다.

 경제논리의 왜곡은 어김없이 정치논리의 왜곡을 가져온다. 경제 본연의 논리에 따르자면, 예컨대 자유경쟁이란 절차를 통해 얻은 결과는 항상 최선의 결과라는 논리를 그대로 수긍한다면 기업의 노사분규는 철저하게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과 그 타협에 일임해야 마땅하다. 아니할 말로 코피가 터지거나 머리가 깨지도록 한바탕 신나게 싸우고 나서 스스로 어떤 결말에 도달하도록 기다려야 한다. 노동상담요원이 옆에서 도와도 제3자 개입이 되고, 학생 몇 명만 눈에 띄어도 불순 세력의 사주라며 요란하게 법석을 떨다가, 급기야는 경찰병력과 헬리콥터까지 동원하며 '진압 작전'을 펴는 이른바 공권력의 행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는지 참으로 딱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경제논리의 왜곡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의 논리 (?) 까지 좀먹어 버린다. 그것은 교육 열병에서부터 아이스크림 소비에 이르기까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광범위하게 사회의 모든 영역을 그대로 점령해나가고 있다. 일생에 한눈 한번 팔지 않고 묵묵히 직장에 충실하다가 이제 곧 정년을 맞게 될 아버지의 수입 정도는 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과외공부 두 탕이면 충분히 올리고도 남는다. 그 아버지에 대한 존경의 감정은 둘째로 치고라도, 그렇게 쉽게 벌리는 돈으로 앞으로의 인생을 과연 어떻게 살아가려는지 참으로 걱정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14만 4000원의 최저임금 지급이 적용되는 전국 4만여 업체 가운데 5% 이상의 사업장은 여전히 이 기준조차 지키지 못하는 실정인데 - 그나마 적용 대상의 업종이 아니거나 10인 이하 사업체의 열악한 현실은 새삼 다시 이를 필요가 없을 것이다 - 요즘 서울의 일부 부촌 아파트에서는 한 개에 1만 원이 넘는다는 수입 과실이 '불티나게' 팔리고 7만 원짜리 손수건에 대한 기사가 화제로 등장하고 있다. 절박한 비명과 즐거운 비명의 공존, 그것도 민주화라고 우긴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참말로 어쩌려고 이러는지들 모르겠다.

[월간중앙 1989년 7월호]
정운영, "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 까치, 1990 에서 발췌



이놈의 나라는 25년 전에서 뭐 하나 나아진 게 없네... 아이고 ㅠㅠ

이렇게 우리는 자본주의의 일관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그나저나 월간중앙에 저런 글이 실렸다니... 우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