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잡상

장하준 논지의 요약

planet2 2009. 4. 7. 22:24

장하준 주장의 요약본이라고 할 수 있는 글이 MRZine 에 게재되었다.

여러 기사들을 통해 그의 생각을 접했었지만 그가 쓴 글을 제대로 읽어 본 적은 없기에 영어 공부도 할 겸해서 공들여 읽었다. 읽어보니 '동의하지는 않지만 가치있는 통찰'로 다가온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이미 읽은 분들 이라면 이 글을 읽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러나 이제 관심을 갖게 된 분들이라면 참고용으로 쓸 만 할듯.

원문 : My Six-year-old Son Should Get a Job: What Is Wrong with the Present Global Economic Order? (MRZine, 2009년 1월 23일)



나의 여섯 살짜리 아들은 일을 해야만 한다: 현재의 글로벌 경제체제는 무엇이 잘못됐는가?
장하준

나에겐 진규라는 이름의 여섯 살 난 아들이 있다. 그는 생계를 꾸려나갈 상당한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얹혀 살고 있다. 나는 그의 숙박, 음식, 교육, 건강보험 비용을 지불한다. 그러나 그의 또래의 수백만의 어린이들은 벌써 일을 하고 있다. 18세기의 작가 다니엘 디포는 어린이들은 네 살부터 생계를 꾸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노동은 진규의 인성에 좋은 영향을 줄 것이다. 경제 거품의 시기인 지금 그는 돈의 가치를 모르고 살고 있다. 그의 나태한 삶을 보조하고 가혹한 현실로부터 그를 보호하는 가정을 꾸려가는 엄마와 나의 수고에 대해 전혀 감사하지 않고 있다. 그는 과보호 받고 있으며 좀 더 생산적 인간이 되기 위해 경쟁에 노출될 필요가 있다. 생각해보면, 더 많은 경쟁을 더 일찍 겪는 게 그 아이의 미래 성장에 더 좋을 것이다. 그것은 근면한 노동을 위해 준비된 정신을 형성하게끔 그를 단련할 것이다. 나는 그가 학교를 집어치우고 일을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만약 법으로 허용되지 않는다면, 어쩌면 나는 아이에게 더 많은 직업 선택권을 주기 위해 아동 노동에 여전히 관대한 나라로 이주할 수도 있다.

내가 미치광이, 근시안, 잔인한 놈이 틀림없다고 비난하는 여러분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당신들은 내게 어린이를 보호하고 양육해야 한다고 말한다. 만일 내가 진규를 여섯 살에 노동시장에 데려놓는다면 그는 아마도 약삭빠른 구두닦이가 되거나 기껏해야 거리의 잡상인이 되겠지만 뇌수술 의사나 핵 물리학자는 되지 못할 것이다. 그건 나의 보호와 투자를 최소 12년 이상 필요로 한다. 완전한 유물론적 관점에서도, 당신은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아끼게 되는 돈을 탐하는 것 보다는 아이의 교육에 투자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라고 나를 다그친다. 어쨌든 내가 옳다면, 올리버 트위스트는 오도된 선한 사마리아인인 브라운로우씨에게 구출됨으로써 노동시장에 남아 계속 경쟁할 기회를 빼앗기기 보다는, 페이긴 노인을 위해 소매치기를 계속했어야 더 잘 살았을 것이다.

이러한 터무니없는 논리가 개발도상국은 대규모로 신속하게 무역자유화를 해야 한다고 떠들어대는 자유무역주의 경제학자들 주장의 본질이다. 개발도상국의 생산자들은 생존을 위한 생산성 향상 유인을 획득하기 위해 지금 당장 가능한 한 많은 경쟁에 노출되어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반대로 보호는 단지 자기만족과 태만을 불러올 뿐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논리는 더 이른 경쟁노출이 경제발전에 더 좋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유인(Incentive)은 단지 반쪽의 이야기일 뿐이다. 다른 반쪽은 능력이다. 만약 진규가 여섯 살에 학교를 그만둔다면 2000만 파운드의 보상을 제안 받거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겠다는 협박을 받는다 할지라도 뇌수술에 대처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개발도상국의 산업 역시 지나치게 일찍 국제경쟁에 노출된다면 살아남을 수 없다. 그들은 선진기술을 습득하고 효율적 조직들을 건설하여 그들의 능력을 배양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당연히 내가 진규에게 제공하는 보호는 그를 경쟁으로부터 영원히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를 여섯 살에 일하게 하는 것이 잘못된 것처럼, 그를 마흔 살까지 보살피는 것 역시 옳지 않다. 궁극적으로 그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직장을 구하고 독립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는 단지 만족스럽고 처우가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 능력을 축적하는 동안만 보호를 필요로 한다.

물론 아이를 양육하는 부모들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듯이 ‘유아기 산업’(유치산업)의 보호는 잘못될 수도 있다. 일부 부모들의 과보호처럼, 정부는 유치산업을 지나치게 귀여워 할 수 있다. 몇몇 어린이들은 성인으로서의 삶을 준비하는 걸 내켜하지 않는데, 마찬가지로 유치 산업의 지원은 몇몇 기업에겐 소용없는 노력이다. 몇몇 어린이들이 교묘하게 그들의 부모를 조종해 유아기 이후에도 지원을 이끌어내듯이, 영리한 로비를 통해 정부의 보호를 연장하는 기업들이 있다. 그러나 문제가 있는 가정들의 존재는 양육 그 자체를 반대하는 주장을 결코 정당화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유치 산업 보호의 실패 사례들은 전략 그 자체의 신뢰를 떨어뜨릴 수 없다. 나쁜 보호주의 사례는 단지 정책을 현명하게 실행해야 함을 우리에게 말해 줄 뿐이다.

10달러 지폐 그리고 자본주의의 비밀스러운 역사

상대적으로 낙후된 경제권의 새로운 산업은 그들보다 뛰어난 외국의 라이벌들과 경쟁이 가능해지기 전까지 보호와 보조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유치산업’론 으로 불리운다. 이것은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의 얼굴을 보았으면서도 누구인지는 알지 못할 어떤 사람에 의해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발전했다. 10달러 지폐에 초상화가 새겨진 알렉산더 해밀턴이 그 이다.

1789년. 해밀턴은 엄청나게 젊은 나이인 33살에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이 되었다. 2년 후 그는 제조업에 관한 보고서 (Report on the Subject of Manufactures) 를 미국 의회에 제출했다. 보고서에서 그는 국가의 산업 발전을 위한 큰 계획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미국과 같은 낙후된 국가는 ‘유아기 산업들’을 외국 경쟁자로부터 보호하고 그들 산업이 스스로 자립할 때까지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사상의 핵심이었다. 해밀턴은 그의 조국의 산업 발전 성취를 위해 다음과 같은 방안을 줄줄이 제안했다. 보호관세, 수입금지, 보조금, 핵심 원자재의 수출 금지, 산업원료의 수입자유화와 관세환급, 발명 독려를 위한 포상과 특허권, 제품 기준의 규제, 금융과 수송 인프라스트럭처의 개발. 비록 해밀턴은 그 정책들을 극단적으로 취하지는 말라고 적절하게 경고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상당히 강력하고 ‘이단적’인 정책 처방들의 모음이었다. 만일 그가 오늘날의 개발도상국의 재무장관이었다면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은 틀림없이 그의 나라에 자금대출을 거부했을 것이며 그를 내각에서 제거하도록 압력을 가했을 것이다.

이러한 방침을 그의 젊은 조국에 권장하던 35세의 건방진 재무장관은 당시엔 2류 대학 (뉴욕의 킹스 칼리지, 지금은 콜롬비아 대학교) 의 인문학 학위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공공연하게 당대 세계최고의 명성을 누리던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의 충고에 반대했다. 당시 대부분의 유럽 경제학자들처럼 스미스는 미국이 제조업을 발전시키지 말 것을 권고했다. 그는 ‘유럽산 제품의 수입을 중단하는 것은 그들 조국이 진정으로 부강하게 진보하는 걸 촉진하는 대신 방해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많은 미국인들이 – 당시의 국무장관이며 해밀턴의 가장 큰 정적이었던 토머스 제퍼슨이 가장 두드러진다 – 위대한 경제학자의 의견에 동의했다. 지극히 당연하게도, 그들은 농산물 수출을 통해 번 돈으로 유럽산의 고품질 공산품을 수입하는 것이 2류 제품 생산을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의회는 해밀턴의 요구를 건성으로 수용하며 관세율을 5% 에서 12% 로 인상했다.

그러나 1812년 영국-미국 전쟁 이후 미국은 보호주의 정책으로 전환을 시작했고 1820년엔 해밀턴의 프로그램이 견고하게 확립되며 평균 산업관세율이 40%를 넘어섰다. 1830년대에는 산업관세율이 문자 그대로 세계 최고에 이르렀고 그들의 공업 패권이 확고해진 2차 세계대전 시기까지 유지됐다.

미국은 유치산업 보호를 이론화한 최초의 국가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의 실천은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 최초로 대규모 보호정책을 실행했던 국가는 놀랍게도 – 일반적으로 자유무역의 창안자로 여겨지던 나라 – 영국이다.

1721년, ‘외국의 원자재를 수입하고 공산품을 수출하는 것만큼 공공복리 향상에 기여하는 것은 없다’는 국왕의 의회연설을 통한 선언에 발맞춰 영국의 초대총리인 로버트 월폴은 우월한 경쟁자이자 당대 유럽의 제조업 중심지였던 저지대 국가들 (벨기에와 네덜란드) 에 대항해 영국의 제조 산업을 보호하고 육성하기 위한 정책들을 연속적으로 시행했다. 월폴의 정책은 다음 세기까지 이어졌다. 1860년대까지는 자유 무역으로 전환하지 않았지만, 월폴의 시대와 1830년대 사이에 영국은 관세를 내리기 시작했는데 프랑스와 독일은 각각 20%와 10% 이었던 것에 반해 저지대 국가 지역에 대한 영국의 평균 산업관세율은 40-50%에 이르렀다. 오늘날 우리는 그러한 국가를 보호 무역주의와 결부시킨다.

자유무역의 본고장으로 알려진 영국과 미국은 아마도 가장 열렬한 – 그리고 가장 성공적인 – 유치 산업 보호의 실천자 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유별난 예외가 아니다. 사실상 오늘날의 모든 부유한 나라들은 그들이 부유해지기 전에 유치산업을 보호하고 육성하는 계획적인 정책 조치들을 취했다.

네덜란드와 1차 세계대전까지의 스위스 (그들에 관한 더 많은 얘기는 후술하겠음) 를 제외하고, 미국과 영국만큼 광범위하게 실시한 나라는 없지만 그들은 모두 관세 보호를 시행했다. 보호수준이 전반적으로 낮았을 때 조차도 일부 전략적 부분은 매우 높은 보호를 취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독일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까지 상대적으로 온건한 평균 산업관세율 (5-15%) 을 유지하면서 철강산업 같은 전략산업에 강한 관세 보호를 적용했다. 같은 기간 동안, 스웨덴 또한 평균관세가 15-20%에 머물렀지만 새롭게 떠오르는 공학산업에 높은 수준의 보호를 제공했다. 벨기에는 20세기의 전반기 동안 전체적으로는 온건한 수준의 보호 (약 10% 정도의 평균 산업관세율)를 시행했지만, 핵심 방직부문 (30-60%)과 철강산업 (85%)은 고강도로 보호했다.

관세는 과거의 부자나라들이 사용했던 무역 정책의 유일한 도구는 아니었다. 유치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방안을 궁리하던 때에, 대부분의 나라들은 수입을 금지하고 수입에 할당을 부과했다. 그들은 또한 수출 보조금을 지급했다. 때로는 모든 수출품목에 (일본과 한국이 그러했다) 그러나 주로는 특정 품목에. 예를 들면, 18세기에 영국은 화약, 베, 정제 설탕, 그리고 비단에 수출 보조금을 지급했다. 또한 몇몇 나라들은 수출을 독려하기 위해, 수출품을 만들기 위해 수입한 원자재에 부과한 관세를 환급해주었다. 나 자신이 그러했듯, 많은 사람들이 이런 방법은 1950년대 일본에서 창안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러나 사실은 17세기 동안 영국에서 만들어졌다.

오늘날의 부자나라들이 자유시장 교의에 반했던 역사적 기록은 단지 국제 무역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투자를 받을 때 그들 대부분은 외국인 투자자들을 차별했다. 미국은 19세기에 금융, 해운, 광산, 벌목 분야에 외국인 투자를 제한했다. 은행부분은 특별히 엄격하게 제한했다. 예를 들면, 19세기 내내 미국에 거주하지 않는 주주들 (non-resident shareholders) 은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었으며 오로지 미국 시민만이 내국 은행의 관리자가 될 수 있었다. 1880년대에 뉴욕 주정부는 심지어 ‘은행 사업’ (예금을 수취하고 어음이나 증권을 할인하는)에 외국은행이 참여하는 걸 금지하는 법을 도입하기도 했다. 놀라운가? 1884년에 쓰여진 뱅커스 매거진 (Bankers' Magazine) 을 고찰한다면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행복한 날은 단 한 주의 우량 미국 주식도 외국의 소유가 되지 않을 때 일 것이다. 미국은 유럽 은행가들과 금융업자들의 개척지가 되어선 안 된다.”

몇몇 다른 나라들은 미국보다 더 나아갔다. 일본은 외국인 직접투자를 엄격하게 규제해 대부분의 산업에 투자를 제한했으며 그 밖의 산업은 1970년대까지 49% 한도의 소유제한을 두었다. 한국은 1997년 금융위기 이후 외국인 투자의 자유화가 강제되기 전까지 이 모델을 충실하게 따랐다. 핀란드는 더 나아가 193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외국인 지분이 20%가 넘는 모든 기업을 공식적으로 ‘위험 기업군’으로 분류했다. 국가들은 이러한 가혹한 통제권을 가지지 않았을 때 조차도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외국기업이 할 수 있는 일에 제약을 가했다. 가장 일반적으로, 그들은 내국의 공급자로부터 특정한 분량이상의 자재를 구입 – ‘국산품 사용 의무’ (local contents requirement) 로 불리우는 것 – 할 것을 요구 받았다.

개발도상국의 국영기업 사유화를 지지하는 그들의 현재 입장에도 불구하고 많은 선진국들은 국가 소유를 통해 그들의 산업을 확립했다. 독일과 일본은 그들의 산업화 시작기에 직물, 철강, 조선과 같은 핵심 산업에 국영 기업을 창설했다. 프랑스의 경우엔, 르노 (자동차), 알카텔 (통신 장비), 생 고뱅 (유리와 기타 건축자재), 톰슨 (전자), 탈레스 (방산 전자), 엘프 아키텐 (원유와 가스), 롱프랑 (제약, 독일기업과 합병, 현재는 사노피 아벤티스의 일부가 됨) 과 같은 익숙한 이름들이 국가소유의 기업 (그리고 르노와 탈레스 같은 몇몇은 여전히 부분적으로 국가소유이다) 이었다는 걸 알게 된 독자들은 놀랄지도 모른다. 핀란드, 오스트리아, 노르웨이 또한 광범위한 국유화를 통해 2차 세계대전 이후 그들의 산업을 발전시켰다. 대만은 세계평균 (약 10% 정도) 보다 1.5배 이상 높은 GDP의 16% 를 생산하는 국영기업 부문과 함께 그들의 경제 ‘기적’을 성취했다. 싱가폴의 국영기업 부문은 GDP의 22% 를 생산하는 세계최대 수준인데 싱가폴 항공 같은 다수의 세계적 기업들을 포함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네덜란드와 (1차 세계대전까지의) 스위스는 높은 관세나 보조 정책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의미있는 방법으로 오늘날의 자유시장 교의에서 일탈했다. 그들은 특허 보호를 거부했다. 오늘날 스위스는 제약부문 특허에 대해 공격적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1888년까지 어떠한 특허 관련법도 보유하지 않았다. 프랑스 (1791) 와 미국 (1793) 같은 나라들에 비하면 거의 1세기 늦게 제정한 것이다. 1888년의 특허법은 화학 (따라서 제약부문까지) 발명을 보호하지 않았다. 화학 기술 ‘차용’에 대한 관대함은 독일로부터 압력을 초래했기에 화학 공정에 관한 특허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화학 물질은 특허의 대상이 아니었다, 당시엔 독일과 대부분의 나라가 마찬가지였다.) 네덜란드는 1817년에 제정한 특허법을 1869년에 폐지하였다. 특허는 그들의 자유무역과 자유경쟁 원칙에 반하는 인위적 독점을 창출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오늘날 다수의 자유무역 이코노미스트들은 이 지점을 못보고 있지만, 그들은 진실로 그러했다) 특허법은 1912년까지 다시 제정되지 않았다, 그 무렵 필립스는 토마스 에디슨으로부터 ‘차용’한 기술로 전구의 주도적 생산자로 확고하게 발돋움했다.

특허법이 있던 나라들조차 지적 재산권 보호는 소홀했다. – 특히 외국인들의 것에 대해서. 영국, 오스트리아, 프랑스 그리고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나라들은 ‘수입된 발명’의 특허를 노골적으로 허용했다. 피터 듀란드가 프랑스인 니콜라스 아펠의 발명을 이용해 1810년에 영국에서 통조림 기술에 관한 특허를 받았을 때, 신청서에는 ‘발명은 어떤 외국인으로부터 전래되었다’고 명확히 쓰여있었다. 당시엔 외국인의 발명에 관해 특허를 취득할 때 일반적으로 그런 단서가 붙여졌다.

‘차용’ 아이디어는 특허를 취득할 수 있는 발명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9세기엔 상표위조 또한 만연했다. – 일본, 한국, 대만 그리고 오늘날의 중국이 행했던 것과 어느 정도 유사하다. 1862년에 영국은 상표법을 개정했다. 상품 표시법 (Merchandise Mark Act)은 특히 독일을 겨냥해 영국산 제품에 대한 외국의 상표위조를 방지하기 위한 특정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개정된 법은 생산자에게 ‘거래 기재사항’의 일환으로써 상품의 제조지역 혹은 국가를 명기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 법은 독일의 독창성을 과소평가했다. – 독일 기업들은 멋진 속임수들을 발견했다. 예를 들면, 그들은 원산지를 나타내는 도장을 각각의 물품들에 찍는 대신에 포장꾸러미에 찍었다. 혹은 실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 원래 제조국가를 나타내는 도장을 찍었다. 독일의 상표위조에 관한 책인 'Made in Germany' 를 저술한 영국의 저널리스트 어니스트 윌리엄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영국에 재봉틀을 대량 수출하는 독일의 한 기업은 ‘Singer’와 'North-British Sewing Machines' 라벨을 눈에 띄게 붙여놓고선 독일산임을 나타내는 도장은 작은 글씨로 페달 아래에 찍었다. 대여섯 명의 여자 재봉사들이 힘을 합쳐야 기계를 뒤집고 그 기념비적인 문구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읽히지 않을 것이다!.’

저작권 역시 일상적으로 위반되었다. 저작권에 관한 현재의 공격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1790년의 저작권법에서 미국은 외국인의 저작권 보호를 거부했다. 저작권에 관한 국제적 합의 (1886년의 베른 협약) 에는 1891년에 비로소 서명했다. 당시의 미국은 저작권 자료의 순수입국 이었으며 단지 미국인 작가들의 보호만이 관심사였다. 한 세기 뒤까지 (1988년까지), 미국 밖에서 출판된 자료들의 저작권은 인정되지 않았다.

나쁜 사마리아인: 사다리 걷어차기와 역사적 기억상실증

그림은 명확하다. 부자나라들은 보호, 보조, 기업의 국가소유, 외국 투자의 엄격한 규제, 그리고 외국인 지적 재산권의 허술한 보호 같은 국가주의적 정책들을 통해 오늘에 이르렀다.

이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부자나라들은 지난 25년간 개발도상국에게 그들의 역사적 경험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정책들을 권유하거나 심지어 강요해왔다. 국제통화기금 (IMF)과 세계 은행의 대부 조건, 그리고 그것에 동반되는 지원 조건들을 통해 부자나라들은 개발도상국에 무역자유화를 강제했다. 국제무역기구 (WTO)는 대부분의 개발도상국에서 관세와 무역규제를 큰 폭으로 낮췄다. 부자나라들은 WTO의 새로운 협상을 무시하면서까지 개발도상국의 산업 관세를 낮추고 그것에 더하여 양자간 그리고 지역적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대부분의 보조가 WTO에 의해 금지되었다. – 농업과 연구 개발 (R&D) 보조와 같은 부자나라들이 여전히 사용하는 것들은 제외하고. IMF와 세계은행이 개발도상국들에게 끊임없이 외국 투자의 자유화 압력을 가하는 동안 한편으로 WTO는 불법적인 국산품 사용 의무 (local contents requirement) 같은 대부분의 외국 투자 규제 조항을 제정했다. 또한 WTO는 본질적으로 가장 가난한 개발도상국들이 미국의 지적 재산권 보호 기준 – 다수의 미국인들조차 자신들의 보호가 지나치다고 여기는 – 을 따를 것을 요구하는 지적 재산권 보호법을 강화했다.

그들은 어째서 이러는 건가? 1841년, 독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높은 관세와 광범위한 보조를 통해 경제적 주도권을 성취했으면서도 다른 나라들에게 자유무역을 설교하는 영국을 비판했다. 그는 세계 최고의 경제적 지위에 도달해놓고선 ‘사다리 걷어차기’를 하는 영국을 고발했다. ‘정상에 오른 누군가가 그가 타고 올라온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는 것은 다른 이들이 그의 뒤를 이어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수단을 빼앗아 버리는 행위로, 매우 보편적인 교활한 방법이다.’

오늘날, 부자나라의 어떤 이들은 후발 시장에서 더 많은 몫을 차지하고 경쟁자들보다 앞서기 위해 가난한 나라들에게 자유 시장과 자유 무역 교리를 설파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했던 대로 하지 말고 우리가 말하는 대로 하라’ (do as we say, not as we did) 고 말하며 곤란을 겪는 사람을 이용해 이득을 챙기는 ‘나쁜 사마리아인’처 럼 행동 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오늘날의 많은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그들의 정책이 개발도상국에 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 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그들이 개발도상국에 권장하는 자유 무역과 자유 시장에 수반된 역사적 이중잣대를 결코 지각하지 못하는 부자 나라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완전히 다시 쓰여졌다.

사악한 비밀 조직이 어딘가에서 체계적으로 사진 속의 못마땅한 사람들을 지워내고 역사적 기록들을 수정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졌으며, 과거를 현재의 입장에서 재해석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질이다. 결과적으로, 부자나라들은 차츰차츰 - 어쩌면 종종 무의식적으로 - 그들의 실제 과거보다는 그들이 바라보는 현재의 자신들의 모습과 더욱 일치하게 그들의 역사를 다시 썼다. – 오늘날의 사람들이 르네상스 ‘이태리’ (그런 나라는 1871년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에 관해 글을 쓰거나 불어를 쓰는 스칸디나비아인들 (노르만 정복왕) 을 ‘영국’ 국왕과 여왕 리스트에 올리는 것과 많은 면이 같다.

그 결과, 다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어쩌면 그들의 조국이 과거에 그러한 경로를 따라 부국이 되었다는 정직하지만 오도된 믿음에 따라 가난한 나라들에게 자유 무역과 자유 시장 정책을 권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그들이 돕고자 하는 사람들의 삶을 더 힘들게 하고 있다.

자유로운 외국 무역과 투자 그리고 강력한 특허 보호 같은 ‘선한’ 정책들을 수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개발도상국들은 지난 25년간 커다란 침체에 빠졌다. 개발도상국가들의 연간 1인당 경제성장률은 1960년대와 1970년대 보호주의와 정부통제의 ‘나쁜 지난 날’과 비교해 절반 가량 줄었다. 그나마도 고속성장 중인 두 거인 중국과 인도 – 물론 여러 면으로 그들 경제를 자유화했지만 신자유주의 처방의 전면 수용은 거부했다 – 가 평균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성장 부진은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이 아시아보다 철저하게 실행된 라틴 아메리카와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라틴 아메리카의 1인당 소득은 연간 3.1% 성장했다. 개발도상국 평균에 비해 약간 빠른 수준이었다. 특히 브라질은 동아시아의 ‘기적’ 경제와 거의 비슷하게 고속성장 했다. 그러나 남미 대륙이 신자유주의를 수용한 1980년대 이래, 라틴 아메리카의 성장률은 ‘나쁜 지난 날’의 1/3 이하로 줄어들었다. 1980년대의 10년간을 조정기로 간주해 그 부분을 계산에서 뺀다고 해도, 1990년대 동안 라틴 아메리카 지역의 성장률은 ‘나쁜 지난 날’에 비해 절반 가량 줄었다. (3.1% vs 1.7%). 2000년과 2005년 사이, 그 지역의 사정은 더 나빠졌다. 성장은 사실상 정지되어 1인당 소득은 연간 단지 0.6% 성장했다. 사하라 이남 지역의 아프리카는 어땠는가 하면, 1인당 소득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조차 상대적으로 느리게 성장했다. (연 1.6%) 그러나 1980년대 이래, 그 지역은 생활수준이 하락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이 기록은 신자유주의 교리에 대한 파멸적인 고발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하라 이남 지역 아프리카 경제는 지난 세기의 마지막 25년간 실질적으로 IMF와 세계은행에 의해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평평한 경기장’에 반대하기

자유시장 정책 밀어붙이기는 가난한 나라들이 국가주도의 정책을 사용하는 걸 더욱 어렵게 한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평평한 경기장’ 이라는 수사를 뻔질나게 떠들어댄다. 그들은 주장한다. 보호, 보조, 규제는 불공정한 경쟁을 초래하므로 개발도상국은 규정외 정책 도구의 사용을 허용해선 안 된다고. 그들이 그러한 것을 허용하면, 축구경기에서 다른 팀들 (부자 나라들)은 기우뚱한 경기장을 기어오르기 위해 분투하는 반면에 개발 도상국 팀은 높은 곳에서 아래로 공격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꼴이라고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주장한다. 모든 보호 장막을 제거하고 모두를 동등한 지반에서 경쟁하게 하라, 시장의 혜택은 오로지 경쟁의 기반이 공정할 때에만 얻을 수 있다. 이처럼 합리적이고 건전한 ‘평평한 경기장’ 이라는 생각에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경제 발전 촉진을 위한 국제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반대한다. 동등하지 않은 선수들 사이의 경쟁에 관해서라면 그렇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래야 한다. 평평한 경기장은 동등하지 않은 선수들끼리 경쟁할 때에 불공정한 경쟁을 낳는다. 축구경기에 빗대어 말하자면, 한 팀은 브라질 국가대표팀이고 한 팀은 내 11살짜리 딸 유나의 친구들로 구성된 팀이라면, 소녀들에게 위에서 아래로 공격하게 허용하는 것만이 게임을 공정하게 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경우에 있어선 평평한 것보다는 기울어진 경기장이 공정한 경쟁을 확보하는 수단이다.

우리가 이런 종류의 기울어진 경기장을 보지 못하는 건 단지 브라질 국가대표팀이 11살 소녀들과의 경쟁을 결코 수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일 뿐이며, 기울어진 경기장이라는 생각자체가 잘못됐기 때문은 아니다. 사실 대부분의 스포츠에서 동등하지 않은 선수들간의 경쟁은 그것이 불공정하다는 명백한 이유로 – 경기장이 기울어졌건 아니건 – 전혀 허용되지 않는다.

축구와 대부분의 스포츠엔 연령별 그룹과 성별 분리가 존재하며 복싱, 레슬링, 역도를 비롯한 많은 스포츠엔 체급 구분이 있다. 또한 구분들은 대단히 세밀하게 나뉜다. 복싱의 경우를 예로 들면, 라이터 웨이트급은 한 체급당 2 내지 3파운드 (1~1.5kg) 이내의 구간으로 나뉘어 있다. 우리는 어째서 복싱 경기에서 2kg 이상 체중 차이가 나는 사람들끼리 맞붙는 건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미국과 온두라스는 같은 조건에서 경쟁하라는 건 받아들이는 건가? 또 다른 예를 들자면, 골프의 경우엔 선수들에게 그들의 실력에 따라 거꾸로 혜택을 주는 ‘핸디캡’이라는 제도까지 있다.

글로벌 경제 경쟁은 동등하지 않은 선수들간의 게임이다. 그것은 광범위한 – 우리 발전 경제학자들이 즐겨 말하듯, 스위스에서 스와질랜드까지 (Switzerland to Swaziland) – 국가들간의 각축이다. 따라서 우리는 약소국을 위해 ‘경기장 기울이기’를 해야 한다. 그것만이 공정하다. 실제적으로는, 이것은 그들의 생산자들을 더욱 강력하게 보호하고 보조하며 더 많은 외국 투자 규제를 허용하는 걸 의미한다. 약소국들에겐 또한 선진국들로부터 아이디어를 더 활발하게 ‘차용’할 수 있게 지적 재산권을 더 느슨하게 보호하는 걸 허용해야 한다. 부자 나라들은 그들의 기술을 더 좋은 조건으로 이전함으로써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더욱 가속화되는 부자나라들의 에너지 절감 기술 개발 추세는 가난한 나라들의 경제성장에 부가적 이익을 제공하며 지구 온난화와 싸워야 할 필요에 더욱 부합할 것이다.

나쁜 사마리아인 부자 나라들은 이러한 모든 것들이 개발도상국을 위한 ‘특별 대우’라고 항의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특별 대우라는 말은 누군가 불공정한 수혜를 받는 걸 칭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휠체어 사용자를 위한 승강기나 맹인을 위한 점자 자료들을 ‘특별 대우’라고 말하지 않는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개발도상국의 더 높은 관세와 부가적으로 사용 가능한 보호 조치들을 ‘특별 대우’라고 불러선 안 된다. 그것들은 단지 다른 능력과 필요를 가진 나라들에 대한 다른 – 그리고 공정한 – 대우 일뿐이다.

마지막으로 결론을 맺자면, 개발도상국에게 유리한 기울어진 경기장은 단지 지금의 공정한 대우에 관련한 문제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경제적으로 덜 발전한 국가에게 단기 이익의 희생을 통해 새로운 능력들을 획득하는 도구의 제공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나라들이 그들의 능력을 더 쉽게 키울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은 경쟁자와의 격차를 줄이는 것을 더 앞당기고 따라서 더 이상 경기장을 기울일 필요가 없게 하는 것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쉬운가

내 주장이 옳으며 경기장은 개발도상국에게 유리하게 기울여야 한다고 가정해보자. 독자들은 그래도 여전히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내 제안을 수용하고 그들의 방식을 바꿀 가능성이 얼마나 되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기적이지 않은 척 하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바꾸려고 애쓰는 건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들 이기심의 깨어있는 측면에 호소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정책들이 다른 선택에 비해 개발도상국의 성장을 둔화시켰기 때문에, 그들이 개발도상국의 빠른 성장을 가져 올 다른 정책을 허용했다면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장기적으로는 더 많은 이익을 얻었을 지도 모른다. 신자유주의의 지난 25년 동안 라틴 아메리카가 그러했듯, 1인당 소득이 연간 1% 성장한다면 소득이 두 배가 되기까지는 70년이 걸린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가 수입 대체 산업을 육성했었을 때 그러했듯 3% 성장을 하면 같은 기간 동안 소득은 8배가 증가한다. 나쁜 사마리아인 부자 나라들에게 더욱 거대한 개척 시장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발도상국의 빠른 성장을 유발하는 ‘이단적’ 정책들을 수용하는 것은 가장 이기적인 나쁜 사마리아인 국가에게도 사실은 장기적으로 이익이 된다.

정말 설득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이데올로그들이다. – 그들이 개인적으로 많은 이익을 얻기 때문이 아니라 그럼에도 정책들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쁜 사마리아인 정책들을 믿는. 독선주의는 흔히 이기심보다 완강하다. 그러나 여기에도 희망은 있다. 모순적이라고 비난 받은 바 있는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유명한 대답을 남겼다. ‘사실이 바뀌었을 때 나는 내 생각을 바꿉니다. 선생께선 어떠신지요?’ 불행히도 전부는 아니지만, 케인즈와 같은 이러한 이데올로그들은 많이 있다. 그들은 변화가 가능하며, 또한 변화해 왔다. 그들은 실제 세계의 사건들의 새로운 국면과 그들이 이전에 보유했던 신념을 넘어설만한 충분한 설득력을 지닌 새로운 논리에 직면했을 경우 그들의 생각을 바꿨다.

우리에게 정말로 희망을 주는 것은 대부분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못 말리는 욕심쟁이도 고집불통도 아니라는 것일 것이다. 나 자신을 포함한 우리 대부분은, 엄청난 물질적 이익을 얻거나 강한 신념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것이기 때문에 옳지 않은 일을 한다. 많은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순응자가 되는 것이 더 쉽다는 단순한 이유로 잘못된 정책들을 따른다. 대부분의 정치가들과 언론들이 하는 말을 그냥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당신은 어째서 ‘불편한 진실들’을 찾아 헤매는가? 그곳 인민들의 타락, 나태, 혹은 방탕을 편하게 비난할 수 있을 때, 당신은 어째서 가난한 나라들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려 하는가? ‘공식’ 설명이 자신들의 나라는 언제나 모든 미덕 – 자유 무역, 창조성, 민주주의, 검약, 그 밖의 뭐든지 – 의 본산지라고 암시할 때, 당신은 어째서 자신의 나라의 역사를 제대로 살펴보려 수고를 하는가?

대부분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나는 희망을 갖는다. 좀 더 균형 잡힌 그림이 제시되면 그들은 기꺼이 자신들의 방식을 바꿀 것이다. 이것은 단지 희망에 의거한 생각이 아니다. 마샬플랜 (60년 전인 1948년에 시작된) 과 신자유주의가 발흥한 1970년대 후반 사이, 부자 나라들은 미국의 주도하에 나쁜 사마리아인 짓을 하지 않았었다. 이 기간 동안, 부자 나라들은 가난한 나라들이 국가주도의 정책 수단을 그들 자신이 평가한 글로벌 경제와의 통합성과 적합도에 따라 그들의 페이스대로 사용하는 걸 허용했다.

부자 나라들이 과거에 적어도 한 번은 나쁜 사마리아인[각주:1]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경제적으로 뛰어난 결과를 창출했던 역사적 에피소드는 – 개발도상국들은 그 이전 또는 그 이후에도 더 나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 우리에게 그 경험으로부터 배워야 할 도덕적 의무를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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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은 캐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이 기고문은 뉴욕의 블룸스베리 출판사에서 2008년 1월에 출판한 나쁜 사마리아인들: 자유 무역의 신화와 자본주의의 숨겨진 역사에 바탕을 두고있다.




  1.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원래 이야기이다. 사실 사마리아인은 냉혹하며 곤란을 겪는 사람을 이용해먹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의 전형으로 인식되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우화에서 강도에게 강탈당한 남자는 ‘선한 사마리아인’에게 도움을 받는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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