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잡상

신용위기 메모

planet2 2008. 9. 1. 22:29

 신용은 자본주의 경제에서 다양한 구실을 하는데, 잘 알다시피 생산력의 팽창 능력을 키우고, 교환을 쉽게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무한히 확장하려는 자본주의 생산의 내재적 경향이, 자본의 크기가 제한되어 있다는 사적 소유의 한계와 충돌할 때, 신용은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이 한계를 극복하는 수단이다. 즉 여러 사적 자본을 하나로 통합해 주식회사로 만들고, 한 자본가에게 산업 신용의 형태로 다른 자본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이다. 나아가 신용은 상업 신용으로서, 상품의 교환과 자본이 생산으로 이어지는 속도를 앞당김으로써 생산과정의 전체 주기를 촉진한다. 신용의 이러한 두 가지 주요 기능이 위기 형성에 미치는 영향은 명백하다. 위기가 생산의 팽창 능력 혹은 팽창 경향과 제한된 소비 능력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면, 위에서 말한 관점에서 볼 때 신용은 분명 가능한 한 자주 이 모순을 분출시키는 특별한 수단이다. 무엇보다도 신용은 생산의 확장 능력을 엄청나게 늘리고, 끊임없이 생산력을 몰아세워 시장의 한계를 뛰어넘도록 하는 내적 추동력을 형성한다. 그러나 신용은 이 두 가지 측면에서 무너져버린다. 신용이 일단 생산 과정의 요소로서 과잉 생산을 낳으면, 위기의 시기 동안 신용은 유통의 수단으로서 신용이 스스로 창출한 생산력을 그만큼 더 철저히 파괴한다. 최초의 정체 징후와 함께, 신용은 무너져 내린다. 신용은 절실하게 필요한 곳에서 교환을 방치해버리며, 여전히 신용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아무런 효과도 쓸모도 보여주지 못한다. 그리하여 신용은 위기의 시기에 소비 능력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뜨린다.

이러한 두 가지 중요한 결과 외에도 신용은 여러 가지 점에서 위기 형성에 연관된다. 신용은 자본가에게 다른 자본을 처분할 수 있도록 기술적 수단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타인의 소유물을 대담하고 무모하게 사용하도록 박차를 가한다. 즉 무모한 축적을 낳는 것이다. 신용은 음험한 유통수단으로 위기를 악화시킨다. 또한 최소한의 금속 화폐가 실질적 기초를 이룬 상태에서, 전체 유통을 사소한 계기에도 교란되고 마는 극단적으로 복잡하고 인위적인 메커니즘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위기의 도래와 확대를 쉽게 한다.

따라서 신용은 위기를 없애거나 약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특별히 강력한 요소다. 이것은 결코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아주 일반적으로 말해서, 신용의 특수한 기능은 바로 자본주의적 관계에서 남아있는 안정성을 제거하는 것이다. 신용은 모든 곳에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유동성을 도입하고, 자본주의의 잠재력을 가장 높은 수준까지 확대시키며 상대적이고 민감한 것으로 만든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본주의 경제의 상호 대립하는 잠재력들간의 주기적인 충돌, 즉 위기는 더 쉽게 발생하며 더 깊어진다.

이제 또 다른 물음이 고개를 든다. 신용은 어떻게 해서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의 ‘적응 수단’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 어떤 맥락에서 그리고 어떤 형태로 적응을 파악하든, 신용의 본질은 분명히 다음과 같은 사실에 있다. 즉 자본주의 경제의 적대적 관계의 일부가 완화되고 모순의 일부가 지양되거나 둔화되지만 그리하여 구속된 다른 생산력이 어느 지점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자본주의 경제에서 모든 모순을 가장 크게 만드는 수단이 바로 신용이다. 신용은 생산을 극도로 확대시키는 반면, 교환은 최소한의 영역으로 마비시킨다는 점에서 생산양식과 교환양식간의 모순을 증대시킨다. 그리고 생산과 소유를 분리한다는 점에서, 즉 생산 자본을 사회적 자본으로 변경시키는 동시에 이윤을 순수 자본 이자의 형태로 단순한 소유권으로 변형시킨다는 점에서 생산양식과 수취양식간의 모순을 증대시킨다. 또 신용은, 소수 자본가가 많은 중소 자본가들을 손아귀에 넣고 엄청난 생산력을 독점하게 함으로써 소유 관계와 생산 관계 간의 모순을 증대시킨다. 그리고 국가가 생산(주식회사)에 개입하는 것을 필연적인 일로 만듦으로써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생산의 사적 성격간의 모순을 증대시킨다.

한마디로 말해서, 신용은 자본주의 세계의 근본적 모순을 재생산한다. 신용은 자본주의 세계의 불합리성을 명백히 보여주며, 따라서 신용은 자본주의 고유의 불완전성을 확인시킨다. 자본주의의 붕괴 속도를 더욱 빠르게 한다. 따라서 신용 문제와 관련하여 생각할 때, 자본주의의 첫째 적응 수단은 신용을 파괴하고 억제하는데 있다. 사실상 현재 존재하는 신용은 적응 수단이 아니라, 최고의 혁명적 영향력을 가진 파괴 수단이다.

Rosa Luxemburg, "Sozialreform oder Revolution?", Leipzig, 1899
[로자 룩셈부르크, 김경미ㆍ송병헌 옮김,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책세상, 2002, 25~28p]
 
 작년 이맘때까지는 잘몰랐었는데 알고보니 좌파학자들의 상당수가 적어도 2005~2006년 경부터 세계경제의 위기를 예견했었다. 자본주의에 내재된 모순이 폭발 임계점에 가까워졌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명박을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의 천박하고 무지하고 기만적인 통치가 위기와 불안을 심화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의 위기는 이명박만의 책임은 아니라는 걸. "대통령 한 놈 잘못 뽑아서 고생" 이라는 말은 옳지 않다. 위기에 일정부분 책임이 있는 노무현이 계속 집권하고 있었다면 달라졌을까? 박근혜, 손학규, 정동영, 문국현, 권영길 (이 양반이 집권했다면 조금 다른 양태의 위기가 전개되었겠지?) 이 집권했다면 달라졌을까?

인물 탓만 하고 인물만 바꿔대는 게 능사가 아니다. 새로운 제도와 새로운 구조의 구축 없이는 "대통령 잘못 뽑은 고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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