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잡상

버스 지나기 전에 손 흔들기 - 2

planet2 2008. 5. 2. 22:08
우리는 초중학교 시절 사회 수업시간에 자유무역은 당사국 모두에 이득을 가져다 준다고 배웠다. 그렇다면 한미 FTA의 상대국이자 ‘동시다발 FTA’의 원조인 미국 사람들은 FTA와 자유무역을 어떻게 여기고 있을까?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 나프타와 서브프라임의 값비싼 대가 (2008.03.10)]



시간이 지날수록 자유무역과 FTA에 관한 반감이 늘고 있다. 수출입이 늘기는 했지만, 그것이 다수 서민의 생활을 개선시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GDP 대비 수출입. 70년대 후반부터 무역의 비중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지니 계수의 변화. 세계화가 심화하던 70년대 후반부터 급격히 증가한다.]



[소득분위별 시간당 실질 임금의 변화. 1973=100. 역시 70년대 후반부터 격차가 심해졌다.]


[성별/소득분위별 임금 불평등 정도]

갈 수록 심각해지는 고용불안정, 소득 불평등 등의 문제 때문에 몸살을 앓는 건 전세계적 현상이고 미국도 마찬가지. 선후관계를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세계화는 문제의 해답이 아니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확신하게 되었고 따라서 FTA반대여론도 고조되고 있다. 미국 최대노총인 AFL-CIO를 비롯한 각종 노동단체는 민주노총 등과 연대해 한미 FTA를 반대하고 있으며 유력한 대선후보인 힐러리와 오바마도 거세지는 반대여론을 의식해 나프타 재협상, 한미 FTA 반대를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말에 진실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들에겐 나프타 재협상을 하겠다고 말한 오바마는 캐나다 관료에게 돌아서서는 ‘이건 그냥 선거용 쑈 일뿐’ 이라고 말했으며, 나프타를 찬성했던 힐러리는 이제 입 싹 씻고 ‘나는 나프타 찬성한 적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다수의 여론을 외면할 수 없지만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세력은 FTA에 찬성하기 때문에 이들은 한입으로 두 말을 하는 것이다. 미국 정치권에 한미 FTA 체결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는 세력 중엔 농민들도 있다고 한다.

노무현 정권은 거의 노골적으로 농업을 포기해야 한다고 떠들어댔었고 이러한 기조는 이명박 정권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보수언론들은 이번 쇠고기 수입을 두고 ‘쇠고기 싸지면 장땡’이라는 식의 기사를 쏟아내며 정부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다.

[매일경제 - 추락하는 산지 소값… 살찌는 식탁 (2008.4.23)]

“과장됐다, 실증이 없다”는 주장을 인정해 광우병의 위험성을 제쳐놓으면, 우리는 정부와 시장론자들의 말대로 수입 개방을 통해 “싸고 질 좋은 고기”를 만끽할 수 있을까?



[2005년을 100으로 놓았을 때 국산과 수입 쇠고기의 가격변동 추이. 각 상품의 절대가격을 나타내는 것은 아님. 자료 : 통계청 품목별 소비자 물가지수]


80년대 이전까지 쇠고기 수입은 간헐적으로 허용되었다. 1988년부터 수입이 재개되었지만 적은 수입물량, 수요확대, 소비자들의 한우 선호 덕분에 한우가격은 안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부터 수입 물량이 증가하고 여기에 외환위기 사태까지 덮치자 한우 가격은 널뛰기 시작한다. 수입 확대가 본격화되기 전인 90년대 중반까지 한우 사육농가는 꾸준히 증가해 95년에 15만 6천 가구로 정점을 찍었었는데 그 이후 수입 본격화와 축산 비용상승으로 한우 사육을 포기하는 농가가 속출해 98년 7만 2천 가구, 2002년 7만 가구로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이러한 급감 추세는 2003년의 광우병 파동으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금지되자 그나마 한풀 꺾였다. 한우 사육 농가의 증감은 쇠고기 가격의 변동을 초래했다. 한우 가격은 축산농가의 사육포기로 인한 도축 물량 증가 때문에 90년대 후반 일시적으로 하락했지만 그 이후의 공급 감소 때문에 급격히 상승했다. 또한 한우 가격이 오르자 수입 물량의 대폭 확대에도 불구하고 수입 쇠고기 가격도 치솟았다. 수입은 경쟁을 통해 한우가격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경쟁을 죽이며 가격을 올려버렸고 덩달아 수입 상품의 가격도 따라 올라갔다.




2004년의 광우병 파동으로 잠시 주춤했던 미국산 쇠고기 수입은 곧 전면 재개된다. 이에 따라 또다시 축산 농가의 한우 사육포기가 잇따르고 있다. 한우 가격은 일시적으로 하락하겠지만 곧 공급부족으로 가격이 오르고, 수입 쇠고기의 가격도 덩달아 같이 오르는 경향이 되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 한우가 수입 쇠고기에 비해 비싼 건 사실이지만 축산농가가 사라지거나 명맥만 남을 경우 우리는 싸고 질 좋은 쇠고기를 즐길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무턱대고 개방하느니, 소의 거의 모든 부위를 먹는 한국 특유의 식생활을 고려한 검역대책을 확립해 수입에 적정선의 규제를 두고, 한우 농가 지원과 한우의 광우병 위험 예방책을 병행하고 왜곡된 유통구조 개선을 도모하는 게 장기적으로는 싸고 질 좋은 쇠고기를 먹기 위한 더 좋은 방안이지 않을까?

적절한 수준의 보호와 지원이 필요한 건 쇠고기 뿐만이 아니다. 농업 생산물은 가격 변동에 공급량 변동으로 대처해 문제를 해결하는 게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농산물의 가격 급변동은 사회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최근의 쌀과 밀 가격의 폭등은 여러 나라에 사회불안을 불러왔다. 3모작 농사로 쌀이 풍족해 10년 전까지 세계 최대 쌀 수출국 지위에 있던 필리핀은 수입 쌀이 자국산 쌀보다 싸다는 이유로 자국 농업 지원을 등한시하고 수입에 의존하는 정책을 폈다. 이에 따라 농업을 포기하는 농가가 속출하고 농지는 사라져갔으며 그나마 남은 쌀 재배 농민들은 저소득에 시달리게 됐다. 이제 필리핀은 세계 최대 쌀 수입국이 되었지만 쌀값이 급등한데다 각국의 수출제한으로 수입마저도 쉽지 않아 시민들이 폭동의 조짐을 보이는 등의 어려운 상황에 봉착했다고 한다.


식량 안보 문제는 있을 수 없으며 자유무역에 맡기면 아무 문제없이 저렴한 식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던 시장론자들의 주장은 명백히 틀렸다. 3년 전만해도 농산물 가격이 너무 낮다고 걱정하던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는 지금은 가격 폭등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문제의 원인 중 하나로 왜곡된 무역구조를 꼽으며 선진국은 농업보조금을 줄여 저개발국 농업과 공정한 경쟁을 하고, 저개발국은 농업투자와 지원을 확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시장에서의 경쟁이 소비자를 이롭게 한다는 논리는 농산물엔 그대로 적용되지 않고 설령 일시적으로 그렇게 보인다고 해도 그것이 궁극적으로 소비자에게 이로운 결과인지는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


[자급률이 높은 쌀은 가격이 장기간 안정적으로 유지되지만 수입 의존도가 높은 작물은 가격 변동이 심하다.]

전문가들은 일시적 문제가 아닌 세계 차원의 구조적 문제가 배경에 있기 때문에 지금의 농산물 가격 상승은 장기간 지속되리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너무 싸도, 너무 비싸도 문제인 농산물은 단지 하나의 산업이나 상품이 아니라 국민의 건강과 생존, 사회 문제와도 직결되는 것이니 세심한 대응이 필요하다. 쌀을 제외하면 식량 자급률이 턱없이 낮은 한국은 최소한 지금의 추세가 강화되는 걸 막고 농업지원을 늘려 농산물 수급의 안정성을 확립해야만 한다. 게다가 이제 먹거리는 단지 끼니를 때우기 위한 것의 차원을 넘어 문화와 여가로써도 활용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전통적인 1-3차 산업의 구분도 흐려져가고 있다. 식량으로써의 문제뿐만 아니라 산업차원으로 봐도 농업의 지원과 육성은 절실하다. 그러나 초국적 자본의 ‘경쟁력 보장’을 위해 장애물을 없앨 것을 요구하는 한미 FTA는 우리 농업의 다양성과 안정성을 보장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값싼 상품과 농산물은 일시적으론 서민들의 살림살이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비춰지지만 결국은 저소득층과 다수 서민들에게 고통으로 다가온다. 영세 상공인과 농민은 '경쟁력 부족'으로 몰락하는데 그들을 집어삼킨 자본은 저가 상품과 농산물을 눈속임용으로 들이밀며 노동자의 처우 개선요구를 거부하며 이윤을 챙긴다.

칠레와 싱가폴과의 FTA와는 차원이 다른 충격을 안겨 줄 한미 FTA를 정 해야만 했다면 노무현 정권이 초기에 스스로 말 한대로 “우리가 충분히 준비되었을 때 장기적으로 추진”했어야 했다. 영세 농가들은 농산물 가격이 내려가면 내려가는 대로 올라가면 올라가는 대로 고통을 받지만 농산물 펀드의 투자자들은 희희낙락하는 구조를 손보고, 세계 경제가 예측하기 힘든 급변동에서 벗어난 후에 해도 전혀 늦지 않다.

맑시스트 경제학자 김수행 교수는 박정희 체제의 60년대 경제개발계획은 ‘위로부터의 계급투쟁’ 성격을 지녔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이런 틀에서 보면, ‘오뤤쥐’에 환장해 한글표기법까지 뜯어 고치자고 덤비는 족속들이 정치-군사적 관계까지 염두에 두고 있음을 명백히 밝히며 집착하고 있는 한미 FTA는 미국 자본과의 합작을 통해 승자독식 체제를 강화하려는 지배세력의 2000년대 판 위로부터의 계급투쟁 전략일 것이다.

복거일 류의 우파 이데올로그들은 시장과 자연을 동일시한 다음 적자생존과 약육강식 등의 자연 법칙을 들먹이며 자연처럼 균형을 만들어내는 시장의 법칙에 순응하라고 강조한다. 좌파는 종교적 망상에 빠져 중력법칙처럼 거부할 수 없는 것에 저항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비웃으면서. 간단하게 말하면 잘사는 사람이 잘 사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니 잘 사는 사람들이 더 잘 살게 하는 일에 모두들 군소리 말고 따르라는 건데, 그러나 초점을 강자가 약자를 포식하는 현상에서 그 너머의 정글로 넓혀보면 그들이 내세우는 ‘게임의 법칙’은 온전히 진실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포식자에게 ‘날 잡아 잡수’라고 목을 내밀며 약육강식에 순응하는 약자는 어디에도 없다. 언제나 포식자에게 잡아 먹히기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수많은 약자들은 대개 집단으로 뭉쳐 강자에 대항하고 자연계는 이러한 수많은 투쟁이 얽히고 설켜 균형을 이룰 때에만 건강하게 존재할 수 있다. (대체로 인간의 잘못에 의해) 균형이 한쪽으로 쏠릴 경우 심각한 후유증을 앓는다는 걸 우리는 숱한 사례들을 통해 충분히 배웠잖은가?

한쪽에선 세계최장의 살인적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아우성을 지르고 한쪽에선 일자리 부족, 저소득, 고용불안 등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아우성을 지르고 있는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허울좋은 ‘자유무역’이 아니다. 날로 확대되는 빈부격차와 서민의 고통을 해결하는데 필요한 건 거대자본과 지배세력의 패권을 위해 다양성을 죽이고 획일화를 초래하는 그 따위 기만이 아니라 88만원 세대에서 제안한 것처럼 다양성을 보장해 안정을 도모하는 사회이다.

짧은 지식 때문에 판단을 못했던 나는 이제 한미 FTA를 반대하게 됐다. 시장론자들은 앞으로도 휘황찬란한 자료와 논리들을 들이밀며 FTA의 당위성을 홍보하겠지만, 나는 고구려의 혼과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신의 손으로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는 전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거짓 국익이 아닌 다수의 소소한 풍요와 안정이 보장되는 사회의 일원이고 싶다.


'사회 > 잡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하준 논지의 요약  (0) 2009.04.07
신자유주의 메모  (0) 2009.02.15
신용위기 메모  (0) 2008.09.01
버스 지나기 전에 손 흔들기 - 1  (0) 2008.04.09
아파트 공화국  (0) 2007.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