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잡상

아파트 공화국

planet2 2007. 12. 7. 21:26

[아파트 공화국] (발레리 줄레조, 길혜연 옮김, 후마니타스, 2007)

어디를 가도 아파트가 눈에 들어오는 걸 피할 수 없는 시대. 말 그대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그것은 어느덧 거기에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대단한 영향을 끼치는 존재가 되었다. 가끔은 이 나라 밖의 사람들에게까지 충격을 줄 정도이다.

프랑스 에서 ‘물질세계나 인간 삶의 공간에 위치한 지리적 단위를 특징짓는 해석 가능한 기호들의 집합체’인 경관(景觀)을 연구하던 어떤 지리학자는 1990년에 한국 방문 후 거대한 아파트단지에 놀라 그것을 연구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대단지 아파트 건설이 어째서 그토록 급격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아파트를 향한 한국인들의 열광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빠른 경제성장과 도시화 때문 이었다 해도 어떻게 시민의 주거구조와 생활양식을 아파트 단지 안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을까? 50년이 채 못 되는 기간 동안 엄청난 물리적 환경의 변화를 겪은 대도시 서울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라는 의문을 품게 된 그는 한국에 다시 와서 여러 조사를 한 후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이 책은 2003년에 프랑스에서 책으로 출간된 그의 논문을 한국독자에 맞춰 재서술한 것이다.

책에는 ‘아파트’의 형성과 발달, 그 과정에서 영향을 주고 받는 사회적 요인들에 관한 고찰이 담겨있다. 저자는 ‘도시화가 만들어내는 메커니즘과 그곳에 거주하는 문제사이의 상관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물질적 측면의 도시와 그 관계자들을 이어주는 요소에 관한 고찰’, ‘삶의 양식에 대한 조사’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분석을 진행한 다음 결과물을 조합해서 살펴보는 방식을 취한다. 이를 위해 건축법, 행정, 경제, 사회, 주거 양식의 변화 등등에 관한 각종자료들을 총망라해 살펴보는 동시에 아파트 단지 내ㆍ외부 주민들과 면접조사를 수행했다. 이런 방대하고 꼼꼼한 관찰은 책의 내용을 알차게 뒷받침했는데, 대신 작업과정에 프랑스에선 아파트에 관해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는 동료연구자들에게 자신의 연구를 인정받지 못하고 한국에선 여기저기서 ‘당연한 것을 묻는 순진한 외국여자’ 취급을 받으며 아파트 주민들과 ‘솔직히 전혀 편하지 않았던 끈끈한 정 나누기’를 해야 해서 마음고생을 했다고 한다.

책을 읽고 그동안 별다른 의문 없이 따랐던 아파트에 관한 통념에 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아파트를 우리 전통의 주거 양식과 단절된 ‘서구적이고 현대적인 주거양식’이라고 여기던 관념에 관한 것. 전통가옥의 구조와 그 안에서의 생활양식, 아파트의 구조와 그 안에서의 생활양식을 비교한 저자는 그러한 관념은 만들어진 이미지일 뿐이라고 말한다. 서구적 주거양식은 아파트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도 보급되었고 오히려 아파트에는 한국 전통가옥의 주거양식, 즉 한국적 특성의 주거양식이 그대로 남아있음을 지적하며 아파트는 서구적인 것이 한국적으로 변형되고 동화되어 나타난 결과물이라고 결론 내린다. 다른 하나는 고층 대단지 아파트가 인구 과밀을 해소하기 위한 ‘당연한 생각’은 아니라는 것.

한국의 아파트와 도시 중산층

가장 눈 여겨 본 마지막 하나는 예상보다 오래되고 폭이 넓은 아파트 ‘투자’ 열광에 관한 것이다. 그동안은 지금처럼 아파트 값에 목메는 사람들이 많아진 건 근래의 일이고 정부와 건설업체, 극소수 투기세력의 장단에 다수는 수동적으로 끌려갔다고 생각했었는데 저자의 설명을 통해 이 생각이 틀린 건 아니지만 정확하지는 않았음을 알게 됐다. 이 부분에 대한 저자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서울 주민들은 아파트에 대한 저항세력을 형성했다. 그러나 새로운 주택 형태를 전파하기 위한 정부의 전략이 도시 역동성을 강남으로 재분배하면서 대규모로 시행되자 여론은 급선회했다. 이러한 여론의 급선회가 국가의 권위주의적 통제의 산물만은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이 사회적 지위를 주장하는 방법에도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1960년대 말만 해도 하위 계층의 주택 유형으로 간주되던 아파트가 왜 점차로 도시 중산층을 대표하는 특성적 기호의 하나가 됐는가를 설명해준다. 또한 주택 시장과 임대 시장에서 각 개인의 접근 방법을 결정하는 경제적-물질적 조건들은, 어떻게 중간계급 대다수가 아파트단지의 대규모 개발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하는 구조를 밝혀준다. 결국 ‘아파트’는 상품이 되고, 재테크의 수단이 되었다. 권위주의 국가는 인구 성장을 관리하고 봉급생활자들이 경제 발전에 헌신하도록 가격이 통제된 아파트를 대량 공급하려 했다. 그리하여 중간계급을 대단지 아파트로 결집시키고, 이들에게 주택소유와 자산 소득 증가라는 혜택을 주었으며 그들의 정치적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결국 이러한 상호 혜택의 구조 때문에 한국의 도시 중산층과 중간계급 일반이 아파트단지를 중심으로 하층의 사회계층으로부터 공간적으로 분리될 수 있었다. 주거 공간의 획일화를 너무도 쉽게 수용하는 한국인들의 문화적 무관심은 이렇게 해서 허용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한국의 아파트단지는 권위주의 산업화의 구조와 특성, 여기서 비롯된 계층적 차별 구조와 획일화된 문화양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이자 그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권위주의 정부는 한편으로 밀어붙이기식 재개발과 대규모 공급을 통해 건설사의 이익을 보장하고 한편으론 분양권 제도 등을 통한 가격통제 정책으로 입주자의 이익을 보장해주었다. 입주권을 살 수 있는 재력을 보유한 중간 계층의 사람들은 정부-건설사와 함께 삼각동맹의 한 축을 구성했고 지금은 체제를 확대재생산 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하층 계층의 사람들은 거대한 아파트 단지의 배후로 사라졌고 동시에 국민 주택, 도시와 주택의 관계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사라져갔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저자의 이런 진단에 동의할까? 그러지 않을 것 같다. 저자와의 인터뷰에 응했던 사람들은 ‘투자’의 효과와 필요성에 대해선 입을 모았지만 자신이 ‘투자’를 했다는 사실은 대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파트를 사야 했던 이유로 그들이 제시한 것은 ‘인플레’. 무리를 해서라도 아파트를 사두지 않으면 상승하는 집값을 따라잡지 못해 나중엔 집을 못 사게 될까 봐 우려했다는 것이다. 아파트 열광의 동참자라고 마냥 좋아하기만 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들에겐 압박도 있었다. 이 부분에서 저자의 대면 조사가 1996년에 이루어졌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이 책엔 2000년대 이후 한층 격화된 투자열기의 양상에 대한 관찰까지 담겨있지는 않다. 내 생각엔, 당시까지는 떠오르는 집값이 사람들을 유인하면서 동시에 압박하는 주요인이었다면 지금은 거기에 ‘교육’이 추가되지 않았나 싶다. 타워팰리스의 가격이 6년 만에 8배 오르는 동안 비슷한 비율로 증가한 사교육비 지출의 관계도 의미심장하다. (결코 중산층은 아닌 내 친구네가 이제 초등학교 2학년 자녀에게 한 달에 50만원 이상 사교육비를 퍼붓는다는 소릴 듣고는 조금 충격 받았다.)

부유한 삶을 바라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 나 또한 간절히 그러길 바라는지라 혹시 기회가 있었다면 열광의 동참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한 번 사두면 어김없이 값이 오르는 상품을 누가 외면하겠는가? 어찌됐건 벌어진 일이야 그렇다 쳐도 앞으로가 문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체제를 통해 계속해서 부를 얻을 수 있을까? 건설사들의 광고처럼 아파트에 살면 우리 삶은 풍요로워질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가 저자의 대답이다. 대단지 고층 아파트는 그 시설 자체만으로 유지 관리 비용의 증대를 불러오고 향후 재건축-재개발, 도시문제 등으로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발생케 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그는 ‘주택이 유행 상품처럼 취급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고, 대단지 아파트는 서울을 오래 지속될 수 없는 하루살이 도시로 만들고 있다’는 결론으로 글을 맺는다.

어쩌면 아파트의 몰락은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사실상의 하인’ 역할을 하던 경비원의 절감이 역으로 아파트와 그 안에 사는 중간계급 사람들의 점진적 쇠락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여기는데 실증 자료도 이런 견해에 설득력을 더 해준다. 그렇잖아도 거품이 끼어있던 마당에, 이 나라 특유의 정서에다 최근의 세계적 추세까지 더해져 아파트 값엔 거품이 팽배했고 이것은 다시 도시 중산계층을 괴롭히는 결과를 낳고 있다.

1987년에 내 집을 마련하는 데 걸린 기간은 결혼 후 8년 5개월이었지만 1997년 이후 2004년 현재까지 10년~11년이 걸린 것으로 나타났다. 이 기간은 서울에선 훨씬 길어지고 참여정부 하에서 더 증가했다. 참여정부 기간 동안 도시근로자의 평균소득은 29% 증가한 데 비해 아파트 가격은 67% 증가 했는데, 근로소득 증가분도 잘 따져보면 다수보다는 소수의 상승 분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세계 대도시들의 소득대비 집값 비율과 비교해보면 서울의 집값은 월등히 높은 수준이다. 그나마 내 집 마련 조달비용 중 돈을 저축해서 조달한 것은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 집값의 4분의 1 이상을 부모의 상속재산이나 가족의 보조를 받아 충당했고, 나머지 4분의 1은 빚을 진 것으로 나타나 부모의 상속이나 가족의 도움에 빚까지 지지 않고는 이 기간 안에 내 집을 장만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집값이 상승하면 아파트 구입 자금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상속 등의 부의 이전도 증가하고 이 때문에 사람들이 아파트에 더욱 집착하는 면이 있지만 급격한 거품팽창은 치솟는 사교육비와 더불어 다음세대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식의 추세가 계속되면 다수의 사람들은 아파트 구입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고, 이렇게 되면 거래가 유지되고 팽창이 지속되어야만 파국을 면할 수 있는 ‘아파트 시장 참여자’들의 몰락을 불러 올 수 밖에 없다.

다음 정권을 기대하는 아파트 투자자들의 ‘숨 고르기’, 담합을 서슴지 않는 입주자들의 ‘의지’를 바탕으로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이 나라 특유의 ‘아파트 신화’ 덕분에 아파트 값은 완강하게 하방경직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최근의 거래부진은 거품이 임계점에 근접한 것이 한 요인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지금의 부동산 시장 소강국면엔 최근의 금융투자 확대 추세가 큰 배경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펀드’로의 급격한 자금유입이 은행의 돈 부족 사태를 부르고 이게 금리를 상승시켜 다시 가계부담을 늘리고 있는데도 주식시장에 대해 조금만 부정적인 기사가 나오면 욕설 댓글이 줄줄이 달리는 걸 보면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든다. 여러 경제관련자들, 특히 좌파 학자들은 ‘금융 자본주의’의 위험성에 관해 꾸준하고 강하게 경고하며 파국은 주택시장의 붕괴로부터 시작될 것이라고 예견해왔다. 과연 “서브프라임 사태”는 강 건너 불이기만 할까? 비슷한 사태가 일어난다면, 한국의 특성 때문에 그 충격이 훨씬 크지 않을까?

국제결재은행에 따르면 1960년 이후 일어난 34개국의 금융위기 가운데 80% 정도가 부동산 등 자산가격 상승을 배경으로 한 과도한 은행대출 확대가 1년 정도 이어진 후에 발생했다. 부동산 문제는 단지 서민의 주거환경을 악화시킬 뿐 아니라 한국경제를 언제든 다시 위기로 빠뜨릴 수 있는 것이다.

- 통계로 보는 부동산 투기와 한국경제 (민주노동당 심상정의원 보좌관 손낙구, 2005.06)



당장의 돈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를 진짜 풍요롭게 하는 건 무엇일까? 그것에 관해 고민해 본적은 있었던가? 주택과 도시, 문화, 사회-경제와 나의 삶의 관계에 대해서 차근차근 살펴보고 아파트 외에 다른 대안은 없는지 생각해보는 걸 이제는 시작해야 할 때가 아닐까?

외부인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볼 때면 거의 언제나 유익함과 한계를 동시에 느끼게 된다. 이 책의 경우에도 한계가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보강조사를 했다지만 위에서 말했던 대로 2000년대 이후의 양상에 대한 관찰이 부족하다. 프랑스의 실정과 비교하는 부분에선 감이 안 잡히는 부분도 많다. 그러나 아파트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한데도 불구하고, 주요 인터넷 서점에서 ‘아파트’로 검색해보면 재테크와 인테리어 서적만 나오는 실정에서 아파트와 그것을 둘러싼 사회와 문화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는 거의 유일한 책이라는 점만으로도 이 책은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세밀한 관찰이 바탕이 된 탁월한 논지전개도 훌륭하다. 저자와 같은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집에 담고 싶은 가치”에 관해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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