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사건

의미심장한 순간

planet2 2007. 7. 24. 23:14
"인간이 종교를 만들지, 종교가 인간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종교는, 자기 자신을 아직 획득하지 못했거나 혹은 이미 자기 자신을 다시 상실해 버린 인간의 자기 의식이고 자기 감정이다. 그러나 인간, 그는 결코 세계 바깥에 웅크리고 있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    종교는, 인간적 본질이 아무런 진정한 현실성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 인간적 본질의 환상적 현실화인 것이다. 따라서 종교에 대한 투쟁은 간접적으로, 그 정신적 향료가 종교인 저 세계에 대한 투쟁이다. 종교적 고난은 현실적 고난의 표현인 동시에 현실적 고난에 대한 항의다.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들의 한숨이며, 심장 없는 세상의 심장이며, 영혼 없는 상황의 영혼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칼 마르크스 :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1844)]

이 경구는 마르크스의 가장 강력한 비유 가운데 하나인데, 1839년부터 1842년까지 영국과 중국 사이에 벌어진 ‘아편 전쟁’으로부터 영감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경구를 앵무새처럼 따라 하는 사람들이 과연 그 말을 이해하고 있을까? 소련에서 마르크스의 해석자를 자임하던 사람들 때문에, 그 말은 보통 종교는 사악한 통치자들이 대중을 흐리멍덩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투여하는 마약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좀더 미묘하고 동정적이다. 그는 ‘종교의 비판은 모든 비판의 전제조건’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럼에도 영적인 충동은 이해했다. 이 세상에서 기쁨을 기대할 수 없는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이 내세에서의 더 나은 삶에 대한 약속으로 위안을 삼는 것은 당연하다. 국가가 그들의 울부짖음과 탄원을 들어주지 않는 상황에서, 누구라도 모든 기도에 응답해주겠다고 약속하는 더 힘센 권위자에게 호소하지 않겠는가? 종교는 억압을 정당화하는 장치이다. 그러나 동시에 억압으로부터의 피난처이기도 하다.

<<마르크스 평전>> (프랜시스 윈, 정영목 옮김, 푸른숲, 2001)
 
상당수의 교회가 국가를 대신해 민중의 호소를 들어주고 눈물을 닦아주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서구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산업의 급속한 발전과 맥을 같이해 교회도 성장했고, 이제는 국가가 이들의 호소를 들어주고 뒷일을 봐주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이렇게 성장한 교회를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그들은 도시 서민들의 헌신으로 성장한 교회가 과연 도시 서민들의 편인지, 교회가 신(神)을 섬기는 것으로 위장해 물신(物神)을 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신을 섬기는 것으로 착각해 비신자들에게 폭력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납치된 선교단원들을 바라보는 비개신교인들의 시각엔 기본적으로 냉소가 서려있었다. 여러 문제들이 뒤얽혀 폭탄 같은 비난이 교회에 퍼부어졌다. 개신교에 관한 대중들의 누적된 반감, 그리고 국가주의. 도를 넘는 비난이 넘쳐났고 견디다 못한 교회는 결국 대국민사과까지 했다. 국가와 체제를 신화화하는데 앞장섰지만 개인의 성장은 외면하던 주류 개신교회와 국가를 숭배하는 무리들의 충돌. 그리고 교회의 사과. 아이러니하고 의미심장한 순간이었다.

무비판적인 체제 순응이 의식 속에 굳어진 사람들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 이번 사태를 통해 깨닫고 종교-국가-개인간의 관계를 재설정 하기를, 그래서 더 존중 받는 개신교가 되기를 바란다. 궁지에 몰린 이들에게 도움을 줄 궁리를 하는 대신, (국가를 위해) ‘순교해버리라’는 끔찍한 비아냥과 유언비어를 쏟아내는 애국지사와 정의의 사도들이 넘쳐나는 건 개신교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상당히 위험한 징후다.

아무쪼록 납치된 분들 모두 무사귀환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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