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사건

파국론

planet2 2007. 8. 21. 00:05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연초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심각하지요. 삼성뿐 아니라 한국 전체가 정신을 안 차리면 앞으로 4, 5, 6년 뒤에는 아주 큰 혼란이 올 겁니다.”

[2007년 3월 9일 MBC 뉴스데스크]

MBC 뉴스데스크는 이회장과 다른 기업가들의 비슷한 발언을 며칠 간격으로 뉴스 첫머리로 다뤘다. 물론 그걸 지켜보던 나는 이건희와 MBC를 무지하게 씹어댔지. 특히 MBC를. 대체 무슨 정신을 어떻게 차려야 하며 어째서 한국 전체는 난데없이 이건희에게 훈계를 들어야 하는가. 왜 아무 논평없이 그들의 '훈시'를 중계만 하는가.

재벌 총수들이 말한 것과는 맥락이 조금 다르겠지만 최근 세계 증시의 급등락 사태는 ‘아주 큰 혼란’이 어쩌면 벌써 도래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품게 한다. 하지만 예전부터 몇몇 사람들은 꾸준하게 ‘이러다 큰일난다’고 외쳐왔다. 기업가들만 경고의 목소리를 낸 것이 아니었다.

‘임박한 경제위기’에 대해 줄기차게 경고했던 미국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 교수는 연초의 중국발 증시폭락으로 세계가 흔들릴 때 이런 글을 쓰기도 했다. [2007년 3월 6일 동아일보 (2007년 3월 2일 뉴욕 타임스 칼럼)]

그는 또한 이번의 증시폭락에 관해 "쓸 수 있는 수단이 별로 없으며 과거의 전례처럼 신속한 위기 탈출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2007년 8월 10일 뉴욕 타임스 칼럼]

주가가 2000을 찍고 정부 관료들은 ‘오랜만의 장기호황 도래’를 외치던 올 7월에 김광수 박사는 주가는 거품이고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은 허약하다고 단언했다.

“역사적 경험을 통해 보더라도 이런 상황이 결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언젠가는 허상이 드러날 거다. 그 때 나타날 후유증은 감당하기 힘들다. 역사적으로 보면 30년대 대공황도 20년대 말의 엄청난 부동산•주식 투기에서 비롯됐고, 80년대 말 일본의 부동산•주식 거품은 장기 불황으로 이어졌다." [2007년 7월 17일 한겨레 인터뷰]

좌파의 전망은 훨씬 비관적이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금융 자본주의’ 의 위험성에 관해서 경고해왔는데 위기의 원인을 저금리 정책이나 폭발적으로 발전한 금융시스템 감독의 어려움 등 제도 운용의 차원에서 찾는 우파들과는 달리 “자본 증식의 적은 자본 그 자체”라는 맑스의 명제를 인용하며 자본주의 체제에 내재된 위기가 다시 한번 노출되었다고 주장한다.

다수 좌파 학자들은 ‘신용위기’의 원인은 일시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현대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에 의한 산업자본(실물경제)의 이윤율 저하에 있으며 그로 인해 출구를 찾지 못하고 과잉 축적된 자본은 상황을 계속 악화시킬 것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다만 주장을 표현하는 강도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온건하게는 “현재와 같은 금융의 폭발적 증가가 지속된다면, 최근 들어 이따금 찾아와 금융시스템을 뒤흔드는 주기적인 ‘신용위기’ 발생이 불가피할뿐더러 결국에는 시스템이 쉽게 흡수할 수 없는 금융붕괴가 일어날 가능성이 증가한다”는 주장이 있다.

[프레드 맥도프 - 미국경제: 부채의 폭발적 증가와 투기 (Monthly Review, November 2006)]
http://dli.nodong.net/RUN/mgr/library_mgr.php?&act=view&code=jrs&uid=612 (번역)

위기가 세계적 대공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대담한 주장도 있다.

[정성진 – 세계대공황으로 귀결될 공산이 크다 (2007년 8월 14일 참세상 칼럼)]

이 사태의 파장이 어디까지 갈까? 여러 가지 추측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지금으로선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미래가 전적으로 미지의 영역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고도의 경제적 지식이 없어도 상식을 바탕으로 과거의 경험들을 찬찬히 되짚어보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리는 충분히 알 수 있다.

빚으로 부풀어오른 거품은 언젠간 터질 것이다. 자본가들과 정부는 기만적 술책을 펴며 경제 위기의 책임을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전가하고 ‘사회의 안정’과 ‘양보’를 더 강도 높게 요구할 것이다. 일시적 경기 후퇴이건 심각한 구조적 위기가 도래하건, 돈도 상품도 주체를 못해 넘쳐나는 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다시 한번 우리의 삶을 쥐어짤게 분명하다.

예전의 좌파들 중 몇몇은 이렇게 심각한 경제적 위기가 닥쳐 노동자들의 생활이 악화될 경우 자동적으로 사회 혁명적 국면이 전개된다고 착각하기도 했었다. (곧 생각을 고쳐먹었지만 맑스 또한 잠시 그런 착각을 했었다) 사회에 혁명의 그림자가 드리웠던 적이 예전엔 드물게나마 있었다지만, 대대적으로 우경화된 지금 우리사회의 노동자와 서민들은 획기적 방안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이랜드를 비롯해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이 상당기간 정체되고 있는데도 연대 총파업에 관한 공감의 도출 조차 쉽지 않다.

지금의 신용 위기와는 별개로, 파시즘적 상황의 도래를 단언한 우석훈 박사의 말은 귀담아 들어볼만 하다. 그는 탈포디즘 단계로의 연착륙에 실패하고 중산층의 해체를 가져온 한국 자본주의는 사회 외부적으로는 소제국주의로의 전환의 끊임없는 모색을, 사회 내부적으로는 파시즘으로 자연스럽게 전환하는 흐름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난국을 타개하는 건 좌우파를 막론하고 만연한 부패와 무능 때문에 쉽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우석훈 – 우리 앞의 파시즘과 소제국주의]

(혹독하고 폭력적인 상황이 닥칠 것이라는 그의 주장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파시즘으로 지칭하는 것이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공황이 닥치건 잠시의 해프닝으로 지나가건 특히 좌파들은 이래저래 험한 시련을 겪을 것이 분명하다. 후퇴를 거듭하고 있는 지금의 추세와 겹쳐 어두운 전망 속에서 길을 잃는 사람들이 속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 좌파에게 밝은 전망과 안온한 미래가 기다리던 적이 있었던가.

그러고 보면 정신 안 차리면 큰일난다는 재벌 총수들의 ‘호소’는 참으로 시의적절 했다.

비관적 전망 속에서도 어떤 일이 무엇 때문에 벌어지고 어떻게 흘러가는지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며 차분하게 생각하는 깨어있는 정신들이, 자본이 비인격적으로 작동한다고 그 때문에 울고 웃는 인간도 비인격적 존재라고 착각 내지 선동하는 작자들의 정신을 번쩍 깨우쳐 주게 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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