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극

정글은 언제나 하레와 구우

planet2 2007. 3. 7. 23:50


정글은 언제나 하레와 구우 (2001)

원작 : 긴다이치 렌쥬로(金田一蓮十郞)



집안일엔 무심한 게으름뱅이에 걸핏하면 술에 취해 해롱거리는 철부지 엄마(웨다) 때문에 종종 곤란을 겪는 초등학생 하레.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정글의 마을에서 평온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한 소녀가 그에게 오기 전까지는.

[하레와 웨다의 일상]

어느 날 술에 취해 귀가한 엄마는 구우라는 소녀를 데려와 그 아이게 부모가 없으니 자신들의 가족과 같이 살자고 하레에게 제안한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라긴 했지만 하얀 얼굴의 상냥한 미소녀에게 반한 하레는 결국 엄마의 제안에 동의한다.

[구우의 등장 (영업 모드)]

그리고 다음날. 구우에게 아침인사를 하던 하레는 전날과는 다른 그녀의 모습에 놀라 자빠진다. 알고 보니 구우는 예쁘고 상냥한 영업용 얼굴과 무뚝뚝한 평상시 얼굴이 180도 다른 아이였다. 영악하게 필요에 따라 얼굴을 바꾸고 마음에 안 들거나 생소한 것들은 일단 먹어버리는 무시무시한 아이였던 것이다.

[놀라는 하레]

하레가 아무리 구우의 실체를 설명해도 어찌된 영문인지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이제 하레에게 평온했던 시절은 사라지고 틈만 나면 온갖 방법으로 하레를 놀리고 괴롭히는 구우와 지지고 볶는 나날이 펼쳐진다.

[분노모드 구우]


[티격태격 하레와 구우]


예전부터 관련 글을 써야지 하다 이제야 쓰게 됐다. 2000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본 일본산 영상물들 중 가장 재미있던 작품이었으니까. 뭐가 그렇게 재미 있었냐구? 음...... 2000년 이후 내가 접한 대부분의 일본산 애니-영화들은 진부한 틀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주었는데 이 작품은 거기서 살짝 벗어나 보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게 없다’는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그들의 정형은 다른 나라 것들에 비해 왠지 날 더 불편하게 만든다. 가령 원작이 같아도 무대가 일본으로 고정되고 일본의 이야기와 일본식 방식이 더 많이 담긴 TV판 공각기동대는 극장판에 비해 정이 안 간다. (애니메이션 매니아들은 나와 의견이 정반대다.)

“하레와 구우”는 그런 기존의 틀을 비틀고 펀치를 퍼붓는다. 그래서 예상 못했던 방향으로부터 웃음을 만들어 낸다. 그 중심엔 여주인공 구우가 있다. 냉소가 서려있는 작고 찢어진 졸린 눈, 낮게 깔린 목소리. 여기에 영업용 모드와 평상시 모드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자기 형편에 따라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 음흉한 성격까지. 기존의 '상냥한 왕눈이' 에니메이션 히로인들에게 ‘썩소’를 날리며 탄생한 이 묘한 아이가 가장 잘하는 일은 멀쩡한 사람 바보 만들기와 바보는 더 바보로 만들기.

하레는 어지간하면 상식과 보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하는, 다른 말로 하면 약간의 위선과 소심함을 지닌 평범한 아이인데 구우는 틈만 나면 그런 하레를 놀려댄다. 때로는 심심풀이로, 때로는 그런 자세가 꼴보기 싫어서. 심지어 가끔은 먹어버리기까지 한다! 하레 뿐만 아니라 관심을 끄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먹어 삼킨 구우의 뱃속엔 온갖 것들이 뒤섞여 또 하나의 세계가 형성되어있다. 유부남 직장상사와 내연하다 자살을 기도한 여인, 어디서 왔는지 모를 고등학생 소년과 소녀, 이상한 생물체들 등등.

이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녀석이 누군가의 집에 흘러 들어와 ‘박힌 돌’과 티격태격하며 기상천외한 사건들을 벌이는 형식의 작품은 여럿 있는데 그냥 좌충우돌 개그 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풍자도 살짝 곁들여진 모습은 우리 만화 둘리를 연상케 한다. 둘리가 80년대 한국 소시민들의 애환을 온정적으로 바라보았다면 이 작품은 90년대 후반 - 2000년대 당대의 세상 풍경을 약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하레와 구우”엔 보편적인 가정이 등장하지 않는다. 제대로 된 아버지, 어머니 역할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구우의 뱃속에 기거하는 인물들은 사회 부적응자들. 그렇지만 이런 문제들을 결코 심각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그들을 동정하지도, 비난하거나 비웃지도 않는다. ‘상식이나 규범 따위'는 어디까지나 웃음거리 이상의 의미는 없으니까. 그렇게 현실을 가볍게 만들어서 그저 웃고 지나갈 수 있게 한달까? 어찌보면 기존의 통념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거 같기도 하다. 그러나 발랄 망측 댄스와 기발한 언행으로 배꼽을 잡게 하는 구우사마의 뒤를 좇다 보면 에피소드 한 편이 뚝딱 끝나있으니 그런 걸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다. 어느새 독특한 생김새와 목소리, 씨니컬한 태도까지 굉장히 귀엽고 사랑스럽게 다가온다.

그게 그거인 애니들, 눈이 큰 미소녀들한테 질렸는가? 답답한 마음을 웃음으로 풀고 싶으신가?

아직 이 작품을 안 봤다면 무조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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