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극

드래곤 사쿠라를 보고...

planet2 2011. 2. 6. 22:36


드래곤 사쿠라 (ドラゴン桜, 2005, 일본 TBS)


도쿄에 있는 사립 류잔(龍山) 고등학교는 공부엔 담쌓은 아이들이 모인 이른바 '똥통학교'로 유명하다. 바로 옆에는 졸업생 셋 중 하나가 도쿄대로 진학할 정도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모여있는 명문고가 있다. 지역주민들은 명문고와 비교해 류잔고 학생들을 차별하고 무시하기 일쑤다. 사정이 이러니 입학을 원하는 신입생의 수는 갈수록 줄고 여기에 경영실책까지 겹쳐 류잔고 학교재단은 도산위기를 맞는다. 이에 따라 도쿄 지법은 은행을 비롯한 채권자를 대리해 학교 경영을 감독하고 관리할 인물로 사쿠라기 겐지라는 변호사를 임명한다.

학교의 남은 자산을 채권자들에게 분배하고 법인은 청산 후 다음 주인에게 인계. 사쿠라기는 처음엔 이런 비교적 간단한 방법으로 사태를 처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청년시절 폭주족 활동을 했던 전력이 주간지에 폭로돼 사건 수임에 곤란을 겪던 그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모험적인 선택을 한다. 변호사로서의 자신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류잔고를 단기간에 입시 명문고로 탈바꿈해 경영을 정상화하겠다는 계획을 내놓는다. 당장 첫해부터 동대(東京大: 도쿄대)에 5명을 합격시키겠다고 호언한 그는 어르고 달래며 얼렁뚱땅 채권자들을 설득한 후 이제 학생들 앞에 나선다.


"이 패배자놈들아! 사회엔 룰이라는 게 있다. 우린 그걸 벗어나 살 수 없다. 그런데 룰은 똑똑한 놈들이 자기들 살기 좋은 쪽으로 만들어 놓았지. 그들은 룰을 이용해 너희를 속이고 지배한다. 이대로 계속 정신 못차리고 살면 너희들은 평생 지배자들에게 속고 착취 당하며 살 것이다. 그게 오늘날의 사회구조다. 그러니까 너희들, 똑똑한 놈들에게 속으며 손해보고 살기 싫으면 공부를 해라. 공부를 해서 룰을 만드는 쪽에 서라. 멍청이와 못난이 일수록 공부를 해서 도쿄대에 가라!"

그의 독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국식으로 치면 '참교육' 엇비슷한 걸 추구하는 교사들에게도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성적보다는 아이들의 개성을 존중하고 매력을 살리겠답시고 전인교육(育) 따위를 떠벌리지만 실상은 아이들을 방임해 오히려 문제를 키웠다는 것이다. "미지의 가능성" 등의 듣기 좋은 소리를 늘어놓지만 실은 교사의 자기만족을 위한 위선과 나태함이 아이들을 망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교사노조에 관해서도 시선이 곱지 않다. 능력은 없으면서 밥그릇만 탐하는 이기주의자들의 집합체로 묘사한다.

이 뒤의 이야기 전개는 전형적이다. 우여곡절끝에 아이들이 모이고 그 아이들은 시련을 이겨내며 성장하고 목표를 성취하고...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본의 만화, 드라마와 영화는 고등학교라는 소재를 - 정확하게는 소위 '청춘'이라고 부르는 고등학생 시절의 시공간을 - 무척 빈번하게 다루던데, 그런데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입시'에 관해 비판적이었다. 악역축에 속하는 인물이 아니라면 대부분 학생에 대한 애정이 없는 "획일화된 입시위주 교육"에 강렬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그들은 학업 성적보다는 소외감, 연애, 인생의 가치 같은 낭만적 문제들을 놓고 고민한다. 성적과 입시는 고민 리스트에서 보이지 않는 저 아래 쪽에 있다. 드라마가 아닌 실제의 학생들도 그러할까? 어쩌면 실제 학생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일 학업성적을 끄집어 내서 모두의 눈앞에 들이미는 건, 내가 본 건 이 드라마가 처음이다.

사쿠라기는 많은 걸 뒤집는다. 어지간한 일본 만화, 드라마에 거의 매번 등장하는 "너는 혼자가 아냐"라는 말을 뒤집어 "누구도 네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창의력을 계발하는 교육이 아니라 스파르타식. 주입식 암기교육이 진짜 교육이라고 말한다. 교사와 학생, 공동체에 대한 조건없는 신뢰를 강조하던 GTO와 고쿠센과는 반대로 추상적 가치를 부정하며 철저한 비즈니스 마인드와 이익이 공유되는 경우에 한한 협력을 강조한다. 낙오자가 생기면 손을 내밀어 돌보다 너까지 뒤처지지 말고 그냥 네 갈길을 계속 가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진부하고 위선적인 사탕발림을 걷어낸, 솔직하며 실현가능한 해법으로 받아들였다, 이윽고 그는 교사보다 존경받는 스승이되고 교육혁명가가 되었다. 사쿠라기의 영향력은 드라마를 넘어 현실에도 작용하기 시작한 것 같다. 도쿄도는 이런 대책을 내놓았다고 한다.

日도쿄 "우리도 공부의 신 도전" - 한국일보, 2010.05.09

지겹지만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또 다시 꺼낼 수 밖에 없다. 내가 중학생이 될 무렵에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말이 대세였는데 세상이 어쩌다 이렇게 변해 버렸나?

별안간 신자유주의라는 악마가 나타나 사람들을 홀렸다! 사악한 주술에 붙들려버린 사람들의 영혼은 타락했고 정신은 붕괴됐다. 사람들이여 깨어나라! 각성하라! 신자유주의라는 악마를 때려잡자! 일부 진보인사들은 사태를 이렇게 바라보고 있다. 조앤 롤링의 해리 포터와 호그와트 학생들은 연대 투쟁해 장학사와 마법부 관료들을 물리쳤고, 문화평론가 하재근과 좌파 언론은 드래곤 사쿠라의 한국판 드라마인 "공부의 신"에 관해 이런 글을 연달아 게재했다.

최악의 막장 사기 드라마 <공부의 신> - 레디앙, 2010.01.14

<공부의 신>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드라마 - 레디앙, 2010.01.21

"<공부의신>, 김수로 말은 독극물" - 레디앙, 2010.02.02

나는 기본적으로 하재근과 입장이 같은데도 그의 글이 영 탐탁치 않다. 도덕적 규탄외에 다른 내용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은 "썩은 사회의 병든 사람들"은 우리의 주장에 마음을 열게 될까? 이런 식으로 몽매한 사람들을 윽박지르며 그들이 회개하고 개심하길 기도하는 것으로 세상이 나아질까?

사람들은 세상이 불합리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정직하게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언젠가 성공한다"는 사회지도층의 말이 기만적이라는 걸 점점 더 많이 깨닫고 있다. 부조리하고 불공평한 사회 현실에 관한 인식만 놓고보면 보통사람과 좌파의 그것은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째서 진보진영에 동조하거나 동참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더 외면하고 무시하며 일종의 도박이라고 할 수 있는 입시 교육에 더욱 열심히 매달리는 걸까? 한때는 세상을 풍미했던 홍길동전이나 공포의 외인구단 같은 작품들이 왜 이제는 홀대받는 걸까?

맑스가 당대의 통념을 거꾸로 뒤집으며 혁명을 추동했듯,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 또한 20세기의 통념을 다시 거꾸로 뒤집으며 자신들의 혁명을 전개했다. 이 판을 또 한 번 뒤집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힌트의 조각을 얻기 위해서, 나는 오히려 특히 좌파라면 다른 이들보다 더욱 열심히 이 드라마를 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현실을 반영했다는 이유로 드라마를 공격하며 "이런 드라마 따위는 만들지 말았어야 한다"고 불평하고 어리석은 대중에 짜증을 내는 건, "썩은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을 바꾸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사람들과 같은 현실을 보고 같은 현실을 살지 않으며 어떻게 그들을 이해하고 설득할 수 있겠는가. 사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말이 유행할 때에 조차도, 아이들은 한편으로는 그 말을 긍정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래도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신자유주의는 사람들의 이런 마음을 파고들었고 결국 헤게모니를 쟁취했다.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어떻게 그들을 설득하는지, 왜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는지 면밀히 관찰하고 복기하며 파고들틈을 노려야 하지 않을까?



+
드라마만 놓고 보면, 공부의 신은 무척 따분했다. 캐스팅부터 잘못됐다고 본다. 원작 드라마의 아베 히로시와 야마시타 토모히사, 나가사와 마사미 등은 (셋 다 좋아하는 편이다) 현실감이 느껴졌는데, '공부의 신'의 아이들은 도무지 고3처럼은 보이지 않는 말 그대로 애들이어서 행동이 자연스럽게 다가오지 않고 위화감만 느껴졋다. 눈만 똥그랗게 치켜 뜨는 오윤아의 연기는 형편없었고, 일본만큼 등장 인물들의 '독한 짓'이 허용되지 않아서 그들의 행동은 원작에 비해 순화되었는데 그나마도 독한 짓을 정당화하기 이런저런 설정을 부연하다 보니 드라마가 '착하게' 되어 버렸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어정쩡했다.

한류가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이런 식의 각종 검열과 과도한 연애 편중이 해소되지 않으면 한국 드라마의 미래는 없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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