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극

그리고 패트레이버 2

planet2 2007. 7. 1. 23:45

패트레이버 2 극장판 (Patlabor 2 The Movie : 1993)

군사 레이버[각주:1] 분야의 촉망 받던 엘리트 연구원 츠게 유키히토는 자신의 이론을 현실에서 확인하기 위해 전쟁이 일어난 동남아시아의 나라에 파병을 자원합니다. "평화유지군" (PKO)의 자격으로... 하지만 기대했던 성과 대신 참혹한 결과를 맞습니다. 전장에 투입해놓고 교전은 허락하지 않는 상식적으론 납득이 가지 않는 전투 지휘부의 지침 때문에 전투에 제대로 임할 수 없었고, 그 때문에 부하들은 몰살되었습니다. 이런 결과가 빚어진 원인이 궁극적으로는 일본 사회의 위선적 평화 - 전쟁에 발을 들여 놓고 있으면서도 전쟁을 부인하는 - 에 있다고 판단한 그는 조용히 귀국해 자신이 겪었던 전쟁을 도쿄에 재현하려 합니다. 자신들이 발 딛고 있는 현실이 얼마나 얄팍하고 불안한 것인지 깨닫지 못하는 일본 사회를 각성시키고 징벌하기 위해…

[신은 아무 말 없이 전장을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츠게는 어떻게 해야 전쟁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미국 군산업계 세력과 일본의 극우파는 서로의 정치-경제적 이익과 그것을 충족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전쟁에 관한 욕망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양측의 속셈을 간파하고 있던 츠게는 일본의 군비증강을 위한 빌미를 찾고 있던 그들에게 군사적 음모를 제안합니다. 미-일 지배자 동맹은 진짜 전쟁이 아닌 군비증강의 명분을 제공할 전쟁 공포쇼만 연출해주기를 바라며 츠게를 후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힘을 자신의 뜻을 현실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게 된 츠게는 곧 진짜 전쟁을 개시합니다. 베이브리지를 날려버린 미사일 한 발은 전쟁의 신호탄이었습니다.

[파괴되는 다리]


미사일 한 발의 위력은 그저 다리 하나를 끊어 놓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태파악을 못하던 일본 정부는 우왕좌왕하다 상황통제력을 잃어가고 경시청의 수뇌부는 이틈을 타 권한확장을 꾀하며 자위대와 신경전을 벌입니다. 그러나 경시청의 무분별한 행태는 오히려 쓸데없는 불안을 야기해 역풍을 맞습니다. 경찰의 독선적 행태에 불안함을 느낀 정부는 결국 자위대에 도쿄 치안을 맡깁니다. 수도에 진입한 군대에 츠게의 영향력이 닿는 부대가 섞여 있다면 도쿄에선 무슨일이 일어날까요? 결과적으로 정부와 경시청은 츠게를 도와주는 방향으로 사태를 몰고 갑니다. 물론 츠게는 이런 식의 상황전개를 계산에 넣고 있었습니다.


[아라카와의 질문]


이런 어수선한 와중에 자위대의 정보요원 아라카와 시게키라는 인물이 특차2과를 찾아와 츠게를 체포하는데 협조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는 협조의 대가로 정세판단과 츠게를 추적하는데 용이한 정보들을 꾸준히 제공합니다. 빠르고 정확했던 그의 정보 덕분에 특차2과는 사건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게 됩니다. 한편 아라카와가 제공하는 정보는 관객들에게도 의미심장한 내용을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가 고토오와 대화하면서 쏟아 낸 평화의 진정한 의미에 관한 철학적 질문, 공허하고 부정한 평화에 관한 변증법적 통찰, 사람들의 안이한 태도에 관한 비판은 이 작품의 핵심적 주제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일각에선 이 부분을 놓고 감독이 군국주의를 은근히 옹호했다고 해석하던데 저는 그런 해석이 완전한 오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의심이 터무니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진실로써의 전쟁이 기만적인 평화를 대체한다는 아라카와의 주장은 군국주의자들의 논리와 대단히 비슷하니까요.

“내 진짜 기분은 활짝 개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혼돈 암울한 평화는 전쟁의 순일(純一)함에 비해 얼마나 흐리고 불쾌한가!”

가와카미 데쓰타로(일본 문예평론가), 1942년 <문학계> 1월호에 쓴 글 '광영 있는 날',
<태평양전쟁의 사상>(나시타니 게이지 외 지음, 김경원 외 옮김, 이매진, 2007) 12쪽에서 재인용



['밑에서 본 세상'님의 "전쟁 예찬론자들"이라는 글에서 옮김]


관객과 고토오는 어쩌면 이 대화를 통해 아라카와의 실체를 파악하는 힌트를 얻었을지도 모릅니다. 감독이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도 곧 밝혀집니다.

츠게와 아라카와는 둘 다 ‘진실로서의 전쟁’이 도래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한 배를 탔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전쟁이 일어나자 둘은 이제 쫓고 쫓기는 입장이 됩니다. 형식적으로는 아라카와가 츠게를 쫓는 입장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쫓기는 쪽은 아라카와였죠. 음모의 동지였으며 본질적으로도 다를 바 없는 둘의 위치는 어째서 달라지게 된 것일까요. 정부와 자위대, 경시청의 엘리트들이 그러하듯이, 아라카와는 멍청한 기회주의자였습니다.

책임있는 사람들은 평화를 지키는데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나구모와 고토오는 현장을 무시한 정치적 독선으로 사태를 악화시킨 경시청 지휘부에 책임인정을 요구하다 직책을 박탈당하고 구속됩니다. 권력과 권위에만 집착하는 상층부의 이런 행태는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나구모와 고토오가 이번에도 평소처럼 순종했다면 전쟁을 막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구모와 고토오 그리고 특차2과 2소대원들은 상부의 지시, 조직의 질서를 전면부정하고 독자적으로 출동해 츠게를 체포합니다. 결과적으로 상부구조를 전복한 사람들이 사회 전복의 위기를 막아낸 것입니다. 엘리트 지배를 뒤엎은 보통 사람들이, 자신들의 발전을 억압하던 상층부와 정면대결을 벌인 사람들이, 기만적 반란에 진짜 반란으로 맞선 사람들이 평화를 지켰습니다.

[2소대의 마지막 출동]


결국 영화를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전쟁을 내재하고 있는 평화'라는 변증법적인 개념을 주제로 현실과 비현실, 평화와 전쟁에 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면서 동시에 군국주의 세력의 지배를 용인하는 일본 사회에 관한 신랄한 풍자, 그리고 주어진 평화너머의 진짜 평화를 쟁취하지 않는 대중의 자각과 반성을 촉구하는 내용이 한데 녹아있는 작품.

두 가지 측면에서 영화와 감독이 흥미롭습니다. 첫째는 일본 사회의 근본적 변혁에 대한 열망을 담은 흔치 않은 영화라는 점 입니다. 군국주의를 비판하고 일본 사회를 비판하는 영화는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보았던 작품들에선 한결같이 미진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예를들어 간장선생 같은 작품을 보면, 엄청난 재앙을 몰고온 오류의 책임은 권력자들에게만 있고 순박한 보통사람들은 예전부터 그랬듯 그저 열심히 살거나 자연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이러면 끝나는 건가요? 세상은 다시 잘 돌아갈까요? 오시이 마모루는 이 영화에서 사회 전체를 정면으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주저 없이 한계를 넘어섭니다.

둘째로, 전공투를 환멸 하거나 냉소하는 동세대의 대부분의 작가들과는 다른 그의 행보입니다. 오시이 마모루 역시 인랑 등의 작품에서 전공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긴 합니다. 그러나 다른 작가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거리가 멀어질수록 그것을 작게 그리며, 잊을 수는 없지만 현재와 미래와는 단절된 것으로 다루는데 반해 오시이 마모루는 그 때의 기억을 집요하게 되가져와 현실과 미래의 시간선에 연결시키려 합니다. 비판은 하되 그때의 무언가를 여전히 손에서 놓지 않고 있습니다. 어째서 일까요?

일본의 문화 상품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전형에서 조금은 벗어나 있는 오시이 마모루의 작품들을 좋아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것이 이 작품입니다. 아직까지 과대평가와 과소평가가 엇갈리며 쌓이고 있는 공각기동대도 물론 엄청나지만 이 영화는 그 탄탄함에 비해 저평가 받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나구모와 츠게의 밋밋한 로맨스와 아라카와의 굴곡을 더 깊이 다루지 않은 것이 아쉽긴 합니다. 그러나 오시이 마모루 특유의 사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인 화면, 실감나는 전투 묘사, 잘 짜여진 스릴러가 주는 재미,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철학적 주제와 현실비판이 담긴 이 영화는 지금까지 제게있어 최고의 영화로 남아있습니다.

[너무나 사실적이면서 동시에 환상적이었던, 가장 인상적인 장면]



*

– 오시이 마모루 작품들에서 느껴지는 정치적 성향, 다수가 우경화 되어 있다는 일본 애니메이션 팬, 오시이 마모루의 자국 내 비인기, 국내 일부 매니아들의 오시이 마모루 적대. 이 현상들은 서로 상관관계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 IMDB에 올라온 Trivia엔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시간이 2시26분이었고 이것은 2.26 사건을 비유하는 의미라고 나옵니다. 하지만 공격시간과 관련해 작품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정보는 2002년 2월 21일 오후 5시 20분경에 베이브리지가 폭파되었다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누군가 오해했거나 드러나지 않는 작품 속 설정상의 정보였겠죠. 츠게의 반군이 도쿄를 폭격하던 날이 2월 26이라면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튼, 박정희는 이 2.26사건을 무척 흥미를 가지고 연구했다더군요.

다시 봤더니 특차 2과가 츠게를 체포하는 날이 2월 26일이네요.



  1. 간단히 말하자면 로봇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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