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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왜 우리는 더 불평등해지는가

planet2 2014. 11. 16. 20:01

[김공회, 김어진, 오창룡, 이재욱, 이정구, 최철욱  "왜 우리는 더 불평등해지는가", 바다출판사, 2014]


“비판적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젊은 학자들”, 내가 보기엔 남한의 젊은 맑시스트들이 요즘 떠들썩하게 대접받고 있는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에 관해 고찰한 논문들을 엮어서 만든 책. 그러니 어떤 "진보"들과는 다르게 피케티에 대한 환호 대신 냉철한 비판이 가득하리라는 짐작을 할만하다. 물론 짐작대로다.


단점부터 말하자면, 6명의 필자들이 다들 일단 "피케티의 논지는 이러저러하다"고 말하며 글을 시작하고 비슷비슷한 설명과 주장을 하므로 내용의 상당부분이 중복된다. 따분함을 자아내는 "노동자 계급의 국제적 연대만이 진정한 해법"이라는 좌빨 도덕 상식을 피할 수 없기도 하고. (물론 이 말은 지극히 옳다!) 그러나 피케티의 논리를 내적으로 논파하는 김공회의 날카로운 글들과 현대 자본주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피케티의 허점을 짚어내는 글들이 앞에서 말한 약점들을 상쇄한다.


<<21세기 자본>>이 고종석같은 리버럴의 단언대로 이 시대의 새로운 고전이 될지 회의적이긴 하지만 피케티 현상은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불평등에 관한 논의의 장을 만들어내고 있으니까. 이 책은 그 논의의 풍성함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똥찬 리뷰가 떠올랐으나 블로그의 여백이 부족...... 아니아니 내 생각의 여백이 부족하므로 뻘소리는 여기서 그만하고 인상적이었던 부분들을 발췌하는 것으로 책소개를 마치겠다.





 

가장 먼저, 피케티가 세상 모든 사람을 자본의 소유자와 비소유자로 구분한다는 데서 출발해 보자. 즉 그가 말하는 불평등이란 기본적으로 이 두 집단 간의 소득 격차 확대에 다름 아니며, 그의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r>g 부등식이 이를 포착한다.

 

……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하나씩 짚어보자. 무엇보다 그의 자본수익률(r)은 애초부터 성립될 수 없는 개념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피케티는 이를 거시지표, 사회적 평균치로 간주한다. 그리하여 하나의 국민경제는 물론 세계경제 전체에 대하여 r을 계산하고 이를 경제성장률(g)과 대비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그가 관심을 갖는 불평등은 일차적으로 미시적 차원의 문제이며, 여기서 사회적 평균치로서의 r, 매우 특수한 조건, 즉 모든 형태의 자산에 대하여 일정 수준 이상의 완전경쟁시장이 형성되어 있고, 상이한 형태의 자산들 간의 형태 전환이 상당한 정도로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모든 자산 소유자가 수익률을 두고 서로 경쟁하는 조건 아래서만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의 1인당 평균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넘는다고 하는데, 개인 간, 가구 간 소득 격차가 매우 큰 상태에서 이 거시경제적 평균치는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자신의 자본수익률이 그 내부에 엄청난 격차를 숨기고 있음을 피케티가 모르는 게 아니다. 특히 다음 구절을 보라.


평균수익률은 매우 상이한 형태의 자산과 투자로부터 나온 수익을 총합한 것이다. 사실 평균수익률을 계산하는 목적은 특정 사회에서 전체적으로 취득한 자본의 평균수익률을 측정하기 위해서다. 이때 개별적 상황에서의 차이점은 무시된다. 분명 몇몇 사람은 평균 수익보다 더 많이 벌어들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못한다.”

 

여기서 핵심은, 하나의 평균치가 사회 전체의 모습을 요약해 줄 수 있느냐 여부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보자. 여기 같은 액수의 자본을 가진 두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리고 한 사람()은 자본을 열심히 굴려(생산활동에 쓴다고 해보자) 한 해에 무려 50%씩 수익을 내는 반면, 다른 한 사람()은 은행에 넣어두고 연 10%의 이자만을 받고 있다고 해보자. 이 경우 이 사회의 평균수익률(r)30%라고 할 수 있을까? 산술적으로야 그렇게 볼 수 있겠지만, 이 수치가 이 사회의 전반적인 상황을 요약해준다고 말하긴 어려워보인다. 갑과 을 각각에게도 별 의미가 없다.

 

비밀은 바로 경쟁의 여부에 있다. 즉 위의 두 사람 사이에 경쟁이 존재한다면 어떨까? 을은 10%의 수익에 만족을 못하고 어떻게든 갑의 수익률에 가까이 가고자 노력할 것이며(을이 갑과 거의 똑같은 장사를 그 옆에서 시작했다고 생각해보라), 이 과정에서 갑의 수익률은 부분적으로 하락할 수도 있다. 만약 이러한 과정이 효과적으로 진행된다면 둘의 수익률은 비슷한 수준에까지 조정될 것이다. 예컨대 갑과 을의 수익률이 각각 32%, 28%가 되었다고 해보자. 이때도 둘 간의 평균수익률은 30%인데, 이것은 분명 두 사람 각각에는 물론 사회 전체에 대해서도 분명한 의의가 있다. 요컨대 갑에게는 절대로 그 밑으로 떨어져서는 안되는 마지노선일 것이고, 을에겐 어떻게든 도달해야 할 목표치일 것이며, 사회 전체적으로는 거기 존재하는 자본의 효율성을 나타내주는 지표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분배 영역에서 관찰되는 다양한 형태의 자본이 반드시 서로 경쟁하는 것은 아니다. 은퇴 후 전원주택을 짓고 노후를 보내기 위해 시골에 대단위 토지를 매입해 둔 사람은 분명 피케티의 개념에 따르면 자본소유자이지만, 자본의 수익률을 두고 그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으며, 사실상 그의 경우 자본의 소유가 수익의 획득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피케티가 종종 인용하는 19세기 서유럽의 귀족도 마찬가지다. 피케티는 소설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들을 자기 식대로 각색해 그들이 마치 수익률에 큰 관심이 있었던 것처럼 꾸며놓았지만, 사실상 그들에겐 일정 수준의 사치에 필요한 금액(예컨대 연간 2만 파운드)을 조달하는 것이 중요하지, 시골의 드넓은 영지에서 몇%의 수익을 낼지는 통상적인 관심사가 아니었다(이 점은 발자크보단 오스틴의 소설에서 더 두드러진다. 실제로 오스틴의 소설에선 자본이라는 말 자체가 거의 나오지도 않는다).

 

물론 경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자본 소유자들은 주식시장에서 서로 경쟁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은 각자 다양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경쟁에 임한다. 이를테면 어떤 이는 주가지수에 연동된 연간 5% 수익에 만족하면서 경쟁에서 한 발 빼고 있을 수도 있지만, 두 기관투자자는 수익률을 0.01%라도 더 높이기 위해 엄청나게 열을 올려 경쟁하면서 모두 10%대의 높은 수익률을 낼 수도 있다.

 

이상과 같이 분배 영역에는 상이한 유형의 자본 소유자들이 혼란스럽게 공존하며, 이들 중 몇몇은 수익을 거두는 일 자체에 무관심하거나 매우 낮은 수익률에도 만족할 수 있고, 어떤 이들은 극심한 경쟁 속에서 매우 높은 수익률을 실현하고 있을 수도 있다. 또한 주식시장의 개미투자자들처럼 섣부르게 수익률 경쟁에 뛰어들었다가 모든 것을 잃는 경우도 있다. 피케티가 말하는 자본의 사회적 평균수익률 r이란 곧 이 모든 이가 거두는 개별적 수익률들(r1, r2, r3, )의 가중평균값일 것이나, 이때 r이 개별적 수익률들을 끌어들이는 일종의 중력의 중심(center of gravity)’ 노릇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사회적 평균값인 r이 설령 g보다 크다고 해도, 피케티가 생각하는 대로 자본 소유자가 비자본 소유자에 비하여 무조건 이득을 보는 것은 아니다. 어떤 자본 소유자는 이득을 보겠지만 다른 자본 소유자는 g보다 낮은 수익률에 만족할 수밖에 없거나 심지어 망하기도 하는 것이다. 즉 평균수익률 E(r1, r2, r3, , rn)=r>g라고 하더라도 rj<gj가 하나 이상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j=1, 2, , n). 이러한 과정에서, 자본가들 사이에서 부가 끊임없이 재분배되면서 부의 집중과 분산이 반복될 것이며, 이러한 분배 경쟁은 사회 전체의 분배, 나아가 불평등의 한 계기를 이룰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상의 사정을 고려할 때 r>g라는 부등식은 결코 자본주의의 동학을 요약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또한 그것은 피케티가 시사하는 대로 불평등의 원인도 될 수 없다. r>g 부등식은 이미 벌어진 불평등을 거시적 총량 차원에서 사후적으로 확인해줄 수만 있을 따름이다. 물론 그렇다고 r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개별 수익률들의 산술적 평균치로서 언제나 존재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피케티가 내놓은 자본수익률은 경제의 전체상을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요약하는 하나의 추상이기는 하나, 마르크스(Karl Marx) 식으로 말한다면 아무런 실질적 의미를 내포하지 않은 공허한 추상(empty abstraction)’일 뿐이다.

 

끝으로, 만약 이상과 같이 개별적 수익률들 간의 체계적 격차를 인정할 경우, r>g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해도 불평등은 커질 수 있다. 왜냐하면 전체적인 평균치가 작더라도 몇몇 자본은 여전히 높은 수익률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피케티 자신이 쓴 대로(12) 대자본의 평균수익률(r1)이 소자본의 그것(r2)보다 높은 것이 보통이라면, r<g라 하더라도 불평등은 커질 수 있다. 대자본을 가진 최상위 1% 또는 0.1%가 거두는 자본수익률은 세금을 제하더라도 g보다 높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간단한 수식을 이용하면 이는 ‘E(r1, r2)=r<g 이더라도 r1>g>r2일 수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1913-1970년대 사이에 위 부등식이 역전되어(r<g) 불평등이 줄어들었다는 피케티의 설명, 곧 그의 <<21세기 자본>>에서 가장 핵심적인 명제는 타당성을 완전히 잃는다. r<g이더라도 여전히 (피케티가 불평등의 가장 중요한 지표로 삼고 있는) 최상위 1%의 소득 비중은 늘어날 수 있고, 피케티에게 이는 곧 불평등이 커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논리적인 가능성일 뿐이지만, <<21세기 자본>>에는 이를 검토한 흔적이 전혀 없다는 게 문제다. 이것은 이 저작의 매우 치명적인 결함이다. 물론 피케티가 내놓은 자료들은 이러한 가능성을 부정한다. 이에 따르면 20세기 중반에 상위 10%는 물론 1%의 소득 비중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우리는 피케티의 자료가 대체로 과세당국의 자료임을 떠올려야 한다. 그가 일러주는 대로 20세기 중반은 과연 부자들에게 혹독한 세제의 시대였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방식의 탈세 내지는 절세 방식이 성행하기도 했다. 부자들과 결탁한 정치인들에 의해 교묘한 방식의 공제제도가 도입되었고, 개인소득에 대한 높은 과세를 피하기 위해 이윤을 기업에 유보시키는 행태가 발달했으며, 각종 역외시장이나 조세천국을 이용한 탈세가 성행했다. 대기업 임원들에게 직접 높은 임금을 주는 대신 회사의 고급 관용차 이용과 같은 혜택을 주는 식으로 소득세를 피하는 관행들이 일반화된 것도 이 무렵이다. 이상은 분명 부자들의 소득을 따질 때 고려해야 할 중요 사항들이지만, 피케티의 자료는 이런 요소들을 처음부터 배제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그는 20세기 불평등 동향의 중요한 일면을 논의에 포함시키지 못했고, 그 때문에 다소 성급하게 세제 덕분에 불평등이 완화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

 

실제로 피케티와 그 동료들이 최근에 보여주는 연구 경향은 다소간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제 연구자들은 1%로 모자라 0.1%, 0.01%등으로 점점 범위를 좁혀 들어간다. 그럴수록 불평등의 양상은 더욱 극적으로 변한다. 이를 적절히 표현하기 위해 각종 자극적인 표현이 동원된다. 하지만 오늘날 불평등의 현실을 밝히는 데 있어, 전 세계 몇 백 위권에 드는 최고 부자들이 얼마짜리 요트를 소유하는지, 그것을 관리하는 데 한 해에 얼마가 드는지 등은 그다지 중요한 질문이 아니다.

 

피케티와 그 동료들이 불평등 논의가 자극적이고 선정적으로 흐르게 하는 데만 기여한 게 아니다. 최상위 계층에 대한 관심 집중은 곧 불평등의 다른 측면들에 대한 관심이 옅어짐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줄잡아 올해 5월부터 <<21세기 자본>>의 흥행에 힘입어 나왔던 국내외 각종 매체의 칼럼이나 기획기사에서 피케티의 표에 나오는 하위 50%의 처지를 고발하는 예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무엇을 말해주는가? 실제로 최근에 피케티의 방법으로 우리나라의 소득불평등을 측정한 김낙년 교수의 연구는 우리나라 상위 10%의 소득 비중이 45%에 육박해 미국에 이어 세계 최고 수준임을 밝힌 바 있는데, 김 교수조차도 나머지 90%의 처지가 어떤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실제로 한 추정에 따르면 우리나라 하위 50%의 소득 비중은 불평등이 가장 심각하다는 미국의 그것(20%)보다 훨씬 낮아 가히 세계 최저 수준인데도 말이다.

 

이상의 문제는 이론적, 논리적 필연성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실천적인 문제다. 따라서 연구자들이 의기투합해 좀 더 윤리적인 방향으로 연구를 해나가면 될 일이다. 그러나 각 소득분위의 집단이 가져가는 소득 비중, 특히 최상위 1%의 소득 비중을 중시하는 피케티의 방식에는 중요한 논리적 결함도 분명 있다. 최상위 1%의 소득이 줄기만 해도 전체적인 불평등이 줄어든다는 환상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 경우 전체 소득액이 줄어 최상위 1%를 제외한 모든 소득분위가 차지하는 비중이 제각각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바로 이것이, 단순히 최상위 1%에 징벌 수준의 과세만 해도 불평등이 줄어든다는 주장이 성립할 수 있는 기본적인 근거다. 이 경우, “상위 1%의 소득이 줄어들 뿐 아니라 그렇게 줄어든 소득이 못 사는 사람들에게 가야지 진정으로 불평등이 줄어든 것이다고 반박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이와 관련해 두 가지하나는 소극적인 비판,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비판만 지적하자. 첫째, 피케티는 세금을 걷는 데만 신경을 쓰지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한다. 그러나 20세기 역사를 돌이켜보면, 세금은 걷는 것보다 쓰는 것이 더 중요했다. 세입 측면만 놓고 본다면, 피케티가 찬양하는 대로 꽤 오랜 기간 90% 이상의 몰수수준의 최고소득세율을 유지했던 20세기 미국은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가 되어 있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아닌 게 아니라 복지국가피케티는 이를 사회적 국가(social state)’라고 부른다란 국가가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었다. 미국은 세금을 불필요한 군비 경쟁 등에 낭비했다. 피케티가 이런 문제를 전혀 건드리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불평등을 다루는 700여 쪽에 달하는 책에서 최상위 부자들에 대한 과세에만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정작 불평등 해소에 가장 효과적인 사항을 너무 소홀하게 다뤘다.

 

둘째, 최상위 1%의 소득이 최하위 50%에게로 가는 가장 직접적인 방식이 바로 임금 인상이다. 이를테면 측정 방식에 따라 최대 800만 명이 넘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비정규직을 전면적으로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면, 피케티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결과가 곧장 실현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21세기 자본>>에서는 이러한 가능성을 전혀 검토하지 않고 있다.

 

......

 

기본적으로 피케티가 모든 형태의 불평등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능력에 기반을 둔 불평등은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다. 표면적으로 그는 예컨대 똑같은 경제적 배경에서 출발했으나 지방 소도시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서 일하는 유미와 서울의 명문대에 진학해 대기업에 들어간 용철이 간의 불평등에 대해선, 적어도 둘의 차이가 학업 능력의 격차에서 비롯된 한에서는 별 관심이 없다. 문제는 용철이보다 수준이 다소 낮은 대학을 나왔으나 용철이가 다니는 회사의 창업주 손자라는 이유로 승승장구하는 재용이와 용철이 간의 관계다. 피케티가 격분하는 것도 이 대목이다. 재용이에게 높은 세금을 매겨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러한 과세는 분명 재용이와 용철이의 관계를 다소간 바로잡아 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유미에게 어떤 이득이 되는지는, 적어도 피케티의 논의 그 자체 속에서는 불분명하다. 이 사회의 맨 밑바닥 50%의 일원인 유미가 우리 사회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일까?

 

이러한 사고는, 피케티가 의거하고 있는 계급적 기반이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 준다. 물론 여기서 피케티란 불평등을 바라보는 최근의 지배적인 경향을 통칭하는 표현으로, 여기엔 앞서 그와 구별했던 보통의 불평등 논자들도 포함된다. 곧 이들은 불평등을 중간계급적 입장에서, 그러니까 최상위 1%를 제외한 9% 또는 19%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는 것이다(물론 이 숫자들은 그저 하나의 예일 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불평등을 문제 삼기 위하여 최상위 1%의 탐욕을 비난하고 그들의 차별화된 생활양식을 고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보다 못한 이들을 불평등 논의에 끌어들이거나1% 공격을 위한 전위부대로 활용하기 위한 게 아니라면그들의 어려운 처지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 그런 의미에서 피케티의 불평등론을, ‘9%를 위한 불평등론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하위 50%에 대한 적극적인 문제 제기가 없는 그의 불평등론은 차 떼고 포 뗀 불평등론이라고 하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1<99%를 위한 경제학인가, 9%를 위한 경제학인가>, 김공회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을 집필하면서 집중한 주요 문제는 오늘날 경제적 불평등의 실태에 관한 분석이다. 따라서 그의 대안이 허술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언뜻 보기에 과도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혹은 그가 경제학자이기 때문에 정치적 문제에 둔감한 것은 충분히 양해 가능한 부분이 아닌가 하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 자본>>대안이 보여준 허술함을 간과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사태의 분석과 동떨어진 우연의 결과기 때문이다. 논의에서 발견된 공백은 20세기 서구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피케티가 자신의 대안을 논하면서 주체와 권력의 문제를 사고하지 못했던, 다시 말해 충분히 정치적이지 못했던 이유는 그가 20세기 중반 서구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전개되었던 정치적 결과와 그 영향력을 제한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21세기 자본>>에서 피케티는 1914년에서 1945년에 이르는 시기의 급속한 소득불평등 감소 원인을 양차 대전이 유발한 정치, 경제적 충격에서 찾는다. 전쟁으로 인한 자본 파괴, 1917년 소비에트 혁명, 대공황 등이 대표적인 충격 사례다. 당시 대격변을 배경으로 자본에 고율의 과세를 부과하는 것이 가능했고, 그 영향력이 지속되다가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약화되면서 오늘날 불평등이 심화되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전쟁과 혁명의 효과는 자본의 물리적 혹은 경제적 파괴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더 주목해야 할 지점은 전쟁과 혁명으로 인해 국가의 공적인 성격이 증대되면서 유발된 효과다. 전쟁과 혁명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은 이전과 같지 않았다. 대중의 정치 참여가 높아졌고, 이들의 요구에 부응해 국가는 이전보다 더 많은 과업을 수행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국가의 역량 또한 증대되었다. 국가기구와 관료들은 총력전과 전시 동원을 통해 학습한 경험을 바탕 삼아 광범위한 영역에서 행정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자본 몰수와 국유화, 부유층에 대한 누진세 등의 정책은 이와 같은 정치사회적 기반에서 나온 것이다. 전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발전이 정착되는 길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적이었던 정치적 질문은 전후 주요 세력으로 성장한 노동자계급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포섭할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많은 나라에서 그 답은 노동자계급이 참여한 사회적 대타협에서 찾을 수 있었다. 국가별로 전개 양상은 달랐지만, 통상 대중적 참여 기구로서 노동조합과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정치, 경제 각 영역에서 자본의 권력을 압박했다. 압박을 가능하게 한 권력의 주된 기반은 노동자계급의 조직된 역량이었다. 그 결과 자본가들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보장,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재생산을 보장받는 대가로 고율의 과세를 수용했다. 과세로 얻어낸 재원은 보건의료, 고등교육, 공공건축 등 대중의 복지 향상에 기여하는 다양한 사회 기반 분야와 제도 확충에 투자되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국가는 재정과 통화 부문에서도 상대적인 자율성을 획득해 자본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었다.

 

특히나 이 시기 독일, 스웨덴 등 일부 국가들에서 수립된 사회협약제도는 노동자계급 대중이 11표제를 넘어 어떠한 방식으로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 다시 말해 민주주의적 가치를 성취하려 노력했는지를 보여준 하나의 시도였다. 통상 전국단위노동조합과 경영자총연맹으로 대표되는 노동과 자본의 정상 조직(peak organization)이 정부로 대표되는 국가의 중재 혹은 개입 아래 고용, 재정 분야 등 거시경제정책 결정에 공동으로 참여했다. 노동자계급은 생산 현장에서의 파업 자제 등 산업 평화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자본과 국가로부터 완전고용 달성, 실업자 구제책 확충, 노동자계급 내부의 임금 격차 축소와 같은 평등주의적 경향을 강화하려 노력했다. 그뿐만 아니라 협약은 산업별 혹은 지역별 단위에서 지속적으로 보충되면서 그 범위와 내용을 확장시켜 나갔다. 생산 현장에서 작업량 조절, 신기술 도입, 신규 인력 고용 등을 둘러싼 노사 간의 공동 결정이 그 사례 중 하나다.

 

이러한 맥락에서 20세기 중반 서구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역사는 평등주의와 민주주의가 교차한 시기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한때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계급적 역량을 전 사회적인 차원으로 투사할 수 있는 미래의 계급으로 여겨졌다. 노동자계급의 번영이 가능하도록 경제를 재구성하는 일이 공동체의 안정과 국익에 직결되었다. 노동과 자본은 자신들이 보유한 권력 자원의 성격과 수준노동자계급의 조직력, 자본가계급의 생산수단 지배력을 인지한 채, 상호협력이 가져다줄 이점과 공존의 길을 모색했던 것이다. 또한 임금 상승, 생산 현장 내 권력 강화 등 노동자계급의 발전은 자본이 더 선진화된 생산방식을 도입하도록 유도하거나 강제하는 요인도 되었다. 노동과 자본의 적대적이면서도 협력적인 공존과 이에 기반을 둔 국가적 발전 전략은 197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요컨대 20세기 중반 서구 선진 자본주의 국가가 성취한 상대적 불평등의 완화는 누진적 과세로 환원될 수 없는 여러 조건을 통해 가능했다. 공공정책 결정에 대한 노동자계급 대중의 깊은 관심은 물론, 자신들의 의사를 공적 영역에서 관철시킬 수 있는 노동자계급의 조직적 역량, 그리고 그 결과물로서 사회적 대타협이 핵심 요소였다. 다시 말해 평등주의적 민주주의의 실현은 역동적 정치 과정으로서 다양한 정치사회적 주체들이 보여준 갈등과 투쟁, 협상과 타협이 교차한 민주적 계급투쟁(democratic class struggle)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전후 자본주의의 황금기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21세기 자본>>에서도 지적하듯이 197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물론 이 문제에 관해 피케티가 처음으로 주목한 것은 아니다. 많은 사회과학자들이 다양한 방향에서 각자의 문제의식을 발전시켜왔다. 따라서 피케티의 관점과 주장 역시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한 우연의 산물이라고 해석하기보다는 기존 논의들의 맥락 속에서 그 위치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피케티 열풍과 관련해 특히나 흥미로운 수렴점 중 하나는 몇몇 논자가 최근 제기해온 비관적 전망이다. 많은 국가가 전 지구화(globalization)와 신자유주의의 파고를 거치면서 평등주의와 민주주의의 교차는 오늘날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민주주의는 전 지구화를 향한 자본주의의 돌진과 보조를 맞추지 못한 채, 개별 국가의 통치 능력을 넘어선 다국적 기업의 강력한 성장을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단을 상실하고 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점차 분리되어 가는 과정에는 기존 제도들을 둘러싼 다양한 변화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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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심지어 자본주의의 종말을 예견하는 논의마저 등장했다. 독일 사회학자이자 사민당 정권의 브레인이었던 슈트렉(Wolfgang Streek)은 피케티의 주장과 유사한 맥락에서, 1) 지속적인 경제성장의 저하와, 2) 공공·민간 부문 전반의 부채 증대, 3) 소득과 자산 양측에서 경제적 불평등의 증대가 전 지구적 차원에서 불안정한 삶을 양산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나 이 세 가지 경향은 서로를 강화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다. 경제적 불평등 증대가 경제성장률을 저하시키고 저성장 경제가 불평등과 분배 갈등을 강화하는 와중에 부채 증대는 경제성장을 저하하면서도 금융화와 구조적으로 연계되어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데 기여한다는 것이다.

 

경제적 불평등 심화로 오늘날 많은 사람이 자본주의 경제와 민주정의 양립 가능성 자체에 회의를 품고 있으며, 유럽의 자본주의는 탈민주주의화, 탈정치화의 경로를 밟아가고 있다. 따라서 앞서 지적한 세 가지 악순환의 고리를 단절할 수 있는 대항세력들(countervailing forces)이 존재하지 않는 한, 오늘날 자본주의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파국적 위기로 발전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4<누가 자본의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이재욱




 

피케티가 세제의 의의를 과대평가한 것은 그가 세제에 대한 적절한 시각을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의 전체적인 메커니즘 속에 세제를 위치시킬 수 있어야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속한 나라들만 보면 현재 대체로 연간 국내총생산의 20-30% 정도가 세금으로 걷힌다. 기본적으로 세금이란 국가가 돈이 필요해 걷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돈이 필요 없다면 세금을 걷을 이유가 없고, 백성이 거기 순순히 동의할 까닭도 없다. 역사적으로 세금을 걷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전쟁 비용 마련이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18세기말 나폴레옹 전쟁기의 영국 정부까지 떠올릴 필요는 없다. 오늘날의 보편적인 소득세제, 피케티가 강조하는 급진적 누진세제 자체가 20세기 초반 전쟁 비용 때문에 도입된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이러한 필요를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때조차도 국민들에게 납득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열전이 아닌) ‘냉전을 지속하기 위해서나 심지어 있지도 않은 전쟁을 준비한다는 명목으로도 국민에게서 엄청난 돈을 걷을 수 있게 되었다.

 

다른 한편, 오늘날 세금은 크게 소득세(개인, 법인), 재산세(상속, 증여, 부동산), 소비세 등으로 나뉘는데, 같은 액수의 세금이라도 걷는 방식, 즉 그 세목별 구성은 매우 다양할 수 있다. 예컨대 <7>에서 보듯, 미국에서 1934년에 국내총생산의 4.8%에 지나지 않았던 총 세수가 불과 10년 만에 20% 수준으로 증가했고, 세목별 구성도 소비세 위주(총 세수 중 45.8% 차지)에서 소득세 위주(78.9%)로 바뀌었다. 이는 소비세가 줄어든 게 아니라 세수 증가분의 대부분이 소득세로 걷혔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소득세나 재산세의 징수는 그 기반이 되는 소득과 재산의 파악이 선행되므로 많은 비용이 야기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세무행정이 덜 발달한 나라들에서는 소비세가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끝으로, 똑같은 서유럽이라도 덴마크는 2011년 기준으로 소득세의 비중이 60.9%OECD에 속한 나라들 중에서 제일 높은 반면, 프랑스는 22.7%OECD평균(33.5%)보다 훨씬 낮다.

 


이렇게 국가가 맡은 역할의 범위에 따라 조세의 총량이 결정되며(애초 걷을 때부터 사용처가 정해져 있는 목적세 따위는 여기선 고려하지 않는다), 나아가 주어진 액수를 어떤 방식으로 걷을 것인가, 즉 각각의 세목을 어떤 비율로 할 것인가는 나라마다, 시대마다 다를 수 있다. 국가는 이렇게 다양한 명목으로 거둬들인 세금을 가지고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수행한다. 다시 말해, 세제란 일차적으로 국가의 역할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에 종속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국가의 역할이란 것 자체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국가, 즉 자본주의 국가를 구성하는 두 핵심 축인 노동과 자본 간의 계급관계에 의해 궁극적으로 결정된다.

 

이 대목에서, 20세기 중반 이후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복지국가가 등장했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경제와 사회의 재생산에 있어 국가의 성격과 역할이 이전에 비해 심대하게 변했음을, 그리고 그것을 바닥에서 결정해주는 계급 갈등의 양상과 양대 계급 간 타협의 내용이 근본적으로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노동 쪽에서는 전쟁 때문에 파괴된 삶의 재생산을 보장해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었고, 자본가들도 점차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지는 경제의 운영을 위한 공동위원회설립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런 일을 국가가 수행하는 데는 물론 돈이 들지만, 그렇다고 급격한 세제상의 개편이 당장 필요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20세기 중반에 서유럽과 북미의 선진국들에서는 이전 두 차례의 전쟁 덕분에, 부자들에게 끔찍스러울 수 있었던 세제가 국민적 동의아래 이미 도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기존의 세제를 그저 선택적으로 유지하고 슬쩍슬쩍 손보기만 해도 초기 복지국가 설립을 위한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는데, 과연 이것은 특히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전쟁이 그들에게 가져다준 커다란 선물이라고 할 만하다.

 

물론 그러한 세제 도입의 공을 전쟁에만 돌리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전쟁은 가장 중요한 배경이자 계기가 되기는 했지만, 세제의 실제적 내용을 결정한 것은 여전히 사회세력 간 세력관계였다. 이를테면, 영국에서 보편적 소득세제는 노동자들의 저항으로 도입되지 못할 뻔했으나, 결국엔 광범위한 공제제도가 함께 묶임으로써 사실상 노동자계급에게 추가적인 부담은 매우 적은 형태로 도입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들 계급이 약해서라기보다는 반대로 이러한 보편세제의 수용을 통해 부자들에게 더욱 큰 희생을 강요할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자본가 측에서도, 아마도 경제의 전반적인 붕괴에 대한, (노동자들의 요구에 따른) 기업과 산업의 국유화에 대한, 나아가 혁명을 통한 자국의 공산주의화에 대한 두려움과 이를 현실화 할 수 있을 정도의 노동자 세력이 없었더라면 자신에게 가혹한 세제를 받아들였을 리 만무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만약 현대 국가에서 (피케티가 우려하는 정부 간 조세 경쟁과 같은 형태로) 세제가 약화되고 있다면, 이는 국가의 역할을 줄여야 한다는 모종의 사회적 합의를 반영하는 것이며, 말할 것도 없이 그 합의는 여러 사회세력 간의 세력관계의 표현이다. 어쨌든 조세의 규모와 구조는 각 나라와 각 시기의 사회경제적, 역사적 조건들, 곧 국가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수준, 또 그 근저에 있는 사회세력들 간의 세력관계를 반영해 천차만별로 결정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피케티에게 중요한 질문은 국가의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는 거꾸로 우리가 그에게 물어야 할 사항이기도 하다. 물론 그가 <<21세기 자본>>에서 사회적 국가’(흔히 말하는 복지국가)를 언급하긴 하지만 이는 지나치게 원론적인 수준에서일 뿐이다. 아울러 국가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합의 수준을 결정하는 계급관계의 의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도 함께 물어야 한다. 계급관계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피케티는 불평등의 현상을 분석할 때는 인정하나 싶더니(최저임금제 도입을 서술하는 대목 등에서) 처방과 대안을 논할 때는 세제 개혁과 이를 위한 정치인들간의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토론에 모든 것은 거는 모습을 보였다.

 

위에서 자본주의하에서 세금을 바라보는 기본 시각으로, 국가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계급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좀더 분석적으로 보면, 세금은 경제 전체의 메커니즘 안에서, 그 일부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일단 자본주의 경제의 전체적인 얼개를 간단히 그려보자.

 

1<99%를 위한 경제학인가, 9%를 위한 경제학인가>에서 좀 더 상세히 논한 대로,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은 생산이다. 마르크스와, 그와 동시대 혹은 이전의 경제학자들이 생각한 대로 바로 이 생산 영역에서 양대 계급인 자본가와 노동자가 직접 마주서며, 전자가 후자를 고용함으로써 생산이 이루어진다. 이 생산의 결과 한 해 동안의 총부가가치, 간단히 말해 GDP가 나오는 것이고, 이는 그해의 분배 재원을 형성한다. 따라서 1차적으로 분배는 노동과 자본 간의 분배, 곧 임금-이윤 분배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위의 임금과 이윤은 각각 부가가치 생산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사회의 다양한 계급에게 분배되기 때문이다. 크게 보면 이윤은 그것을 일차적으로 취하는 자본이 생산을 조직하고 생산의 산물을 판매할 때 도움을 준 다양한 자본가계급(: 잉여 화폐 소유자, 각종 서비스 제공자)에게 이자나 지대 등의 형태로 분배될 것이고, 임금은 노동자에게 주거를 제공하는 자들에게 역시 지불될 것이다. 이러한 분배 이후에 각자의 손에 남는 것이 그들의 진정한 수입을 이룰 것이고, 그들은 이를 개인적 소비나 다음 해의 생산을 위한 투자에 쓸 것이다.

 

이상의 일반적 내용을, 모든 자산 소유자를 자본가로 보는 피케티의 틀에 맞게 채색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한 공동체의 인구는 크게 둘로 분류된다. 자본 소유자(C)와 비소유자다. 편의상 후자를 모두 노동자(L)로 가정하자. 그러면 자본가는 성격에 따라 크게 셋으로 분류된다. 생산을 직접 조직하는 자본가(C1)와 그에게 일정한 도움을 주지만 생산을 직접 행하지는 않는 자본가(C2), 끝으로 생산 자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주거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가로 일정한 지대를 챙기는 자본가(C3)가 그들이다. 이들 간의 분배는 아래 그림과 같이 이루어진다.

 

이 그림에서 명확히 드러나는 것은 분배와 관련해 자본 소유자와 비소유자가 어떤 식으로 서로 맞닥뜨리는가 하는 점이다. 결국 둘 간의 분배, 그리하여 (피케티는 자본 소유의 불평등을 소득불평등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삼고 있으므로) 불평등 자체는 세금을 통한 2차적인 분배 영역까지 가기도 전에 이미 여기에서 결정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러한가?



첫째로 이들은 총생산의 임금과 이윤으로의 분배를 둘러싸고 갈등한다(L C1). 따라서 무엇보다 임금을 높이는 일이야말로 자본의 이익을 제한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인 것이다. 둘째로 자본의 소유자와 비소유자는 주거와 관련해서도 자본가와 직접 부딪힌다(L C3). 이 대목에서 두 집단은 주택 임대료의 결정을 두고 서로 갈등한다. 주거권의 보호와 주거 안정을 위한 세입자들의 투쟁이 불평등 완화를 위해 어떤 중요성을 갖는지가 여기서 드러난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은 기본적으로 생산적 자본가들을 돕는 자본 소유자들과는 어떻게 갈등하는가(L C2)? 원래 노동자들은 이들과 직접적으로는 별 상관이 없었으나 최근 들어 이 둘 간의 고리가 긴밀해지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가계 신용이 급속도로 발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그것은 그저 고가의 내구재(자동차나 텔레비전) 구매를 돕는 정도였지만, 이러한 가계부채는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전체 국민소득에 육박하는 정도로까지 발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LC2는 이자율의 결정을 둘러싸고 갈등하고, 이는 경제 전체의 불평등 양상을 결정하는 한 계기를 이룬다. 예컨대 최고 대출이자율을 낮출 수 있다면 불평등이 줄고 서민들의 삶이 상당히 나아질 것이다.


이렇게 보면, 결국 앞의 그림에서 각 유형의 자본가가 거두는 총소득의 상대적 크기인 (C1+C2+C3)/(C1+C2+C3+L)이 피케티가 말하는 α값에 해당하는 데, 이상의 논의로부터 피케티는 간과했던 이 값의 중요한 의의가 새삼 드러난다. 피케티는 이 값을 그저 거시적으로 관찰하면서 오랜 기간에 걸쳐 상당히 안정적인 값을 갖는 상수인 것처럼 취급했다. 그러나 이 값는 위와 같이 분해해서 생각해보면, 무산대중과 다양한 자본가계급 간의 갈등을 한꺼번에 보여주고 있다. 즉 이들 무산계급은 첫째, 자신을 직접 고용한 자본가(C1)에 대항해 임금 인상을 요구함으로써, 둘째, 자신에게 고리로 돈을 빌려준 자본가(C2)에 대항해 최고이자율 제한을 요구함으로써, 셋째, 자신에게 주거 서비스를 제공하는 집주인(C3)에 대항해 임대료 인상 제한을 요구함으로써 맞설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러한 과정이 사회 전체의 불평등의 양상을 가장 본원적으로 결정한다. 피케티가 안정적인 값을 갖는다고 한 α값이란 바로 이러한 역동적인 갈등의 동학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야 우리는 세금의 의의를 제대로 따질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세금을 통한 재정적(fiscal)방식이 피케티가 생각하는 것만큼 불평등 해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리라는 것이다. 오히려 현대 국가에서 일반적으로 채택되고 있는 보편적 납세제도는 자본가들과 지배계급이 경제를 운영하고 미세하게 조정하는 좋은 수단이 된다.

 

앞서 말한 대로, 세금의 크기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고 해도, 그것을 걷는 방식은 다양하다. 이는 특히 계급 간 세력관계에 의해 본원적으로 결정된다고 말했는데, 이를테면 추가적인 세수가 필요할 때 마침 노동자의 힘이 약하다면 이를 노동자들이 부담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공공요금 인상이나 담뱃값 인상 등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이다. 명품가방을 사거나 해외에서 신용카드를 쓸 때에 세금을 더 물리지 않고 왜 하필 담뱃값이겠는가?

 

다른 한편, 아무리 노동자들의 힘이 약하다고 해도 그들을 무작정 억누를 수는 없다. 결국 그들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가장 중요한 엔진이고 자본이 이윤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소비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부담은 노동자가 스스로 흡수할 수 없고, 결국 그것은 자본가가 부담할 수 밖에 없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자본주의 경제란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아서, 그 안에서 사람은 하나의 주체가 아니라 거꾸로 시스템의 한 부속물로 전락하고 만다. 그렇다면 그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기계나 매한가지이고, 그가 받는 임금이란 고작 기계를 유지, 보수하는 비용에 다름 아니다. 이때 기름값이 올랐다고 해보자. 자본가는 처음 얼마간은 기름을 조금 덜치는 등의 방식으로 비용 증가를 막으려고 하겠지만, 그러한 절역이 기계의 기능을 방해하는 수준에 이르면 결국 자본가도 비용을 더 들여 기름 더 쳐야 할 것이다.

 

이제 편의상 노동자의 임금이 바로 그러한 한계 수준에 늘 머물러 있다고 가정해보자. 실제로 이것은 마르크스가 도입한 가정이기도 한데, 그렇다고 이 한계 수준이라는 표현에서 쪽방촌의 절망적인 상황까지 떠올릴 필요는 없다. 그때그때 계급 간의 세력관계에 의해 사회적으로 (일시적으로) 합의되는 최소한의 평균상태라고 생각하면 된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 요금을 이런 한계 안에 포함시킬 것인가, 어느 정도로 포함시킬 것인가 등의 문제에 정답이란 없다. 이해 당사자인 자본과 노동이 서로 갈등하면서 일시적으로 합의할 뿐이다. 당연이 이러한 평균 상태에는 해당 사회가 지닌 역사와 각종 개별적 특수성이 반영되어 있을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는 임금의 결정에는 역사적, 도덕적 요소가 개입한다고 썼다. , 이런 한계 상태에서 노동자는 당연히 세금을 낼 수가 없고, 모든 세금은 자본가들로부터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보편적 소득세제가 도입된 이후에도 한동안 세금은 모두 자본가들이 냈다. 노동자들은 대체로 소득세를 면제받았으며, 당시 세수의 큰 비중을 차지하던 소비세도 대체로 부유층의 소비 품목에 부과되었다(지금도 소득세의 90% 이상을 상위 40%가 내고 있다).

 

이러한 방식의 과세를 자본가가 받아들이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어쩔 수 없기도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세금을 가지고 국가가 하는 일들이 결국은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 일이란 결국 세 가지 범주로 나뉘는데, 첫째, 기본적인 사회질서 유지, 둘째, 경제적·사회적 인프라 건설, 셋째, 노동력의 용이한 재생산 도모가 그것이다. 이 모든 것이 전체 자본가에게는 이득으로 돌아온다. 자본을 재생산하는 데 드는 비용을 절감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에 대한 과세가 불평등을 완화시킨다는 피케티의 주장은 세입 측면에 이목을 집중시켰을 때만 성립한다. 그러나 세출 측면까지 고려하면, 다시 말해 그들이 낸 세금이 결국 어떻게 쓰이는지를 보면 세제가 불평등 완화에 기여하는 정도에 대해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오늘날에는 노동자들이 전체 세수의 상당 부분을 담당한다. 굳이 재산이 없더라도, 그들은 소득세, 소비세, 사회보장세의 일부를 내지 않는가. 그런데 위에서 소개한 임금이론에 따르면 이것은 사전에 임금이 한계 수준이상으로 올랐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당연히 그러한 인상은 무엇보다 노동자들의 저항과 요구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세금의 징수는 이러한 임금 인상의 효과를 (일부) 상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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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현대 국가의 보편적 납세제도는 경제를 조절하는 좋은 수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매우 중요한 정치적 효과까지 달성한다. 그것은 “‘국민의 대다수인 노동자 및 그 가족들도 정상시민이라는 환상을 자아내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해준다는, 그러니까 그들 스스로 주인의식을 갖게 한다는 커다란 정치적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치의 차원에 보통선거가 있다면 경제의 차원에는 보편적인 납세제도가 있다. 이 둘은 근대 세계가 낳은 쌍생아다.”

 

6<세금으로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을 수 있을까>, 김공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