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
복거일, [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 삼성 경제 연구소 (2005)
제목과 저자, 출판사를 보면 어떤 책인지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평소의 가치관과 상반된 내용이 담겼을 게 뻔한 책을 골랐는가? ‘내가 자본주의에 관해 너무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주장도 들어보고 균형을 찾아보자.’ 라는 생각이 약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주된 이유는 아니다. 지피지기랄까? 조금 먼 장래에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으려 하는데 그에 앞서 ‘주류 경제학’의 기초를 공부할 계획을 세웠고 먼저 일단 ‘자본주의 다이제스트’로 시작하는 게 어떨까 생각해서 고른 것이 이 책이다. 자그마한 크기의 140페이지 정도 분량의 책이니 가볍게 읽기에 적당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내가 이 책에 기대한 것은 심오한 내용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긍정적인 면에 관한 개괄적 설명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 기대했던 성과를 얻지 못했다.
본질적 정의
저자는 책의 첫머리에 자신의 의도와 목적을 명확히 밝힌다. 제목만큼이나 직설적이다.
근년에 우리 사회에선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이 거센 물살이 되었다. 활기찬 자본주의 체제 덕분에 우리사회가 지난 한 세대에 빠른 발전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런 사정은 반어적이지만, 우리는 그런 반어를 느긋한 마음으로 음미할 처지가 못 된다. 그러기엔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은 우리의 안녕과 복지에 너무 큰 위협이다. …… 이 책은 자본주의가 효율적이어서 사회적 번영과 개인적 자유를 함께 허여할 뿐 아니라 자연스럽고 정의로운 체제라는 사실을, 실은 그런 자연스러움과 정의로움에서 그것의 효율이 나온다는 사실을 밝히려는 시도다. …… 자본주의는 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정의롭기에 사람들은 그것에 고마운 마음을 품어야 한다.
이를 위해 그는 슘페터, 하이예크, 프리드먼 같은 경제학 거장들과 진화심리학자들의 의견을 현란하게 인용해 논지를 전개한다. 그의 주장을 따라가보자.
자본주의가 정의롭다는 사실은 그것이 자연스럽다는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 정의가 사람 마음에 자연스러운 무엇으로 다가오리라는 생각은 합리적이다. 자연스러움이 정의의 핵심적 특질들 가운데 하나임을 명확하게 증명하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자연스럽지 않은 무엇이 정의로운 경우는 상상하기 어렵다. 정의감이 진화의 산물이므로, 그런 사정은 필연적이다.
그런데 전제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자연스러움이 정의의 핵심적 특질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의는 자연스러운 것이라니. 결국 부자연스러운 것, 즉 비본능적인 것은 정의가 아니고, 자연스러운 것들 가운데에서도 어떤 것은 정의롭고 어떤 것은 아닐 수 있다는 말인데 난 이런 식의 모호한 전제를 바탕으로 논지를 전개하는 글을 별로 본적이 없다. 실체의 규명이 덜 된 대상을 탐구할 경우 ‘A는 B가 아니고 C가 아닌 것이다.’ 라는 식으로 본질 대신 다른 것에 빗대서 규정하는 것은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때에도 최소한 B가 아니고 C가 아닌 것으로 성격을 한정해서 제시한다. 저자의 마음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소지가 있는 이런 ‘만능 규정’은 보수언론들의 전형적인 도구이다. 비슷한 사건과 상황을 자신들 입맛에 따라 나쁜 쪽으로 몰기도 하고 좋은 쪽으로 만들면서 글을 전개할 때, 논거로 활용되는 건 언제나 자의적이고 모호한 전제 아닌가.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 역시 그런 식으로 논지를 펼친다.
이 이상하게 꼬인 대전제는 그렇다 치고 다음으로 넘어가보자. 자본주의는 어째서 자연스러운가? 저자는 재산권을 그 답으로 제시한다.
개인이 인류의 기본 단위이고 경제 활동들이 개인들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재산들은 일차적으로 그것들의 형성에 공헌한 개인들이 소유하게 마련이다. 실은 소유권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누구도 자신의 힘과 시간과 돈을 들여서 재산의 형성에 착수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유재산 제도를 기본 질서로 삼는 자본주의는 자연스럽다. 반면에, 사회주의는 그런 자연적 질서가 인공적 과정을 거쳐 바뀐 뒤에야 비로소 들어설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의 성립에 동원된 강제력과 자원이 줄어들면, 사회주의 체제는 이내 허물어져서, 그 사회는 자본주의 체제로 돌아간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자본주의는 '자연적 체제'다. '디지털 시대'에 보다 어울리는 표현을 쓰면, 자본주의는 '디폴트 스테이트(default sate)'이다. ...... 자연히, 자본주의 체제를 어떤 형대로든 바꾸려는 시도는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들고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도 장기적으로는 모두 지치게 마련이다. 그것은 중력을 거스르는 일과 성격이 비슷하다. 힘을 쓰면, 우리는 무거운 것들을 들어 올리거나 높은 곳에서 아래로 굴러내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누구도 오래 중력을 거스를 수 없고, 모든 물체들은 중력에 이끌려 디폴트 스테이트로, 즉 가장 낮은 곳으로, 모인다. 물론 순수한 자본주의는 나온 적도 없었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우리가 사회를 이루어 사는 한, 사회적 선택은 필수적이고 따라서 순수한 자본주의는 실재할 수 없다. '혼합 시장 경제(mixed market economy)'라는 말이 일깨워주듯, 시장 경제를 지향하는 경제 체제들도 지금 사회주의적 특질들을 짙게 띠고 있다. 그러나 그런 사정이 자본주의의 본질적 우월성에 대한 반론은 되지 않을 것이다. ...... 사정이 그러하므로, 재산의 소유관계를 밝히는 재산권은 사람들의 삶에 가장 근본적 수준에서 작용한다. 아주 넓게 정의하면, 그것은 개인적 자유와 실질적으로 뜻이 겹친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한 사람의 몸 자체가 그의 재산의 핵심이고 다른 재산들은 그의 몸이 만들어낸 것들이며 몸과 재산은 또렷이 구분되지 않는다. 그런 상태에서 예견할 수 있는 것처럼, 재산권은 흔히 인권이라 불리는 것에 필수적이며 핵심적이다. …… 따라서 자본주의가 정의롭다는 것을 밝히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재산권이 본질적으로 정의롭다는 점을 밝혀야 한다. 자본주의가 사유재산 제도에 바탕을 두었고 사유재산 제도는 재산권을 통해 세워지고 유지되므로, 재산권은 자본주의의 핵심이다. 만일 재산권이 정의롭지 못하다면, 다른 면들에서 아무리 좋다하더라도, 자본주의는 정의로울 수 없다. …… 자본주의 사회들에서 재산에 대한 권리는 기본적으로 재산의 형성에 대한 공헌에 바탕을 둔다. 그래서 어떤 재산의 형성에 공헌한 사람들이 공헌의 정도에 따라 그 재산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그런 관행은 아주 자연스럽고 합리적이다. 우리는 그것 말고 다른 어떤 기준도 이내 생각할 수 없다. …… 인류 역사에서 재산의 형성에 대한 공헌에 바탕을 두지 않은 재산권을 구성원리로 삼은 사회는 없었다. …… 이처럼 여러 증거들은 우리의 발전되고 섬세한 정의감은 재산권과 관련된 원초적 정의감이 진화한 것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재산권을 핵심적 제도로 삼은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정의롭다. ...... 그런 원칙은 인류 사회들에서 보편적 원칙이었으며, 원시적 사회들과 어린아이들까지도 그렇게 여기고, 심지어 다른 종들까지도 그 원칙을 따른다.
‘내가 벌어들인 만큼 내가 소유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따라서 개인들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체제는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재산권을 핵심원리로 삼는 자본주의는 자연적 질서에 따라 구축된 "자연적 체제" 다른 말로 Default State이고 이 디폴트 스테이트에 인위적 조작을 가하는 건 중력을 거스르는 일이나 마찬가지여서 비용만 들고 실패로 돌아 갈 것이다. 그러니 거부할 수 없는 자연적 질서에 맞서지 말고 순응해 살아가야 한다.’ 이것은 이 책의 핵심적인 내용인지라 서두에서부터 후반부까지 같은 말이 줄기차게 반복된다.
재산은 그것을 창출한 사람이 소유해야 하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말 자체는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무언가가 자연스럽다는 이유만으로 정의와 결부시킬 수는 없다. 자연스러운 것은 정의와 동의어인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누군가와 연애를 하는 건 말 그대로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 일뿐 그걸 두고 정의롭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게다가 저자의 말대로 "사회주의 역시 재산의 소유는 그것에 형성에 대한 공헌을 근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인류역사상의 모든 사회가 재산권을 사회 구성원리로 삼았다면 (심지어 다른 종까지!!) 재산권을 핵심원리로 삼는다는 이유로 자본주의를 정의롭다고 말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모든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필기를 하고 있다면 유독 한 학생만 골라내 수업시간에 필기를 했다고 상을 주는 건 어불성설이니까.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기도 하다.
저자는 정의감, 도덕심, 상호 이타주의 등의 관념이 인류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재산권과 관련해 발달하게 되었으므로 재산권은 정의롭다고 단언한다. 종의 진화는 개체들의 생존 경쟁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인간을 포함한 몇몇 동물들에겐 생존경쟁에서 둥지나 영역 같은 재산들이 결정적으로 중요했으므로, 자원이 한정된 상황에서 다른 개체들에 맞서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려 하던 것이 재산권에 관한 원초적 개념으로 발전했고 이와 관련된 욕구, 본능, 행위가 우리의 심성과 행태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이루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재산권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본능적인 것인지 설명하기 위해 그는 어린아이들이 ‘자기 것’을 빼앗겼을 때 크게 화를 내는 건 자신의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몸짓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몇 페이지 앞에 써놓은 ‘재산은 본질적으로 법적 개념이며 법체제 안에서만 존재한다’는 설명과, 줄기차게 되풀이 했고 바로 앞 문단에서도 언급한 ‘어떤 물건의 생산에 기여한 사람이 그것을 소유하고 분배하는 권리를 지닌다’는 말은 뭘까? 아리송한 게 점점 늘고 있다.
아무튼 이러한 개별개체의 이기주의는 그들이 의도하진 않았지만 역설적으로 전체 집단엔 이익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개체들은 각자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받은 만큼 되갚기 (Tit for Tat) 전략을 따랐는데 이것이 상호적 이타주의의 근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메커니즘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사회의 이익을 북돋는다는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그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재산은 상호적 이타주의를 실현하는 수단이었으며 재산의 상호제공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이에게 향하는 분노가 정의감의 본질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인간의 진화과정에서 재산을 둘러싼 생존경쟁이 정의감이나 이타주의 등의 도덕관념의 핵심을 형성했고 따라서 정의감은 ‘자연적으로’ 재산권을 내재했으니 재산권은 정의롭다는 것. 저자는 “이처럼 여러 증거들은 우리의 발전되고 섬세한 정의감은 재산권과 관련된 원초적 정의감이 진화한 것을 보여주고 따라서 재산권을 핵심적 제도로 삼은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정의롭다”고 선언한다.
여기까지 읽고, 재산권과 도덕의 핵심은 진화의 산물이라는 저자의 주장을 전제로 정의와 진화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절대성이나 상대성의 대립 같은 나로선 결론 내릴 수 없는 철학적 논의는 배제하고 상식만 놓고 생각해보면, 정의란 당대의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적용되고 권장되며 영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미래의 어느 시점까지는 누구나 적극적으로 옹호해야 할 당위를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환경에 대한 적응, 즉 가변성이 핵심인 진화를, 보편과 당위가 핵심인 정의와 결부시킬 수 있을까? 진화는 오직 한 방향으로의 ‘발전’ 혹은 ‘미래에도 고수해야 할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니다. 인류의 개입으로 엄청나게 변화한 환경과 수 만년 동안 그 환경에 적응해 변화했고 또한 변화도상에 있는 인류와 환경을 생각하면 시점과 내용은 알 수 없어도 양자의 변화는 예정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을 보편적 당위와 결부시키는 건 적절하지 않다. 저자 역시 그 점을 생각했기 때문인지 재산권은 보편절대적 가치에 부합하는 것이어서가 아니라 ‘정의감을 형성했고 정의감의 핵심을 이루기 때문에’ 정의롭다고 주장하지만 재산권이 정의감을 형성했다는 그의 말에 과학적으로 설득력이 있다손 쳐도 재산권과 정의를 등가취급 하는 것은 여전히 비논리적이다. 복숭아씨가 복숭아의 핵심을 이룬다고 복숭아씨를 복숭아 열매와 같은 것으로 취급할 수 있나? 플라스틱으로 키보드를 만들었다고 플라스틱과 키보드는 같은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나? 아니다. 물질적 비물질적으로 여러 가지 것들이 더 해져 복숭아와 키보드로서의 특성과 기능을 가지기 전까지 복숭아씨는 복숭아씨일 뿐이고 플라스틱은 플라스틱일 뿐이다.
실질적 정의
재산권의 본질이 정의롭건 아니건 간에 실제적 측면에서 정의와 상관없다면 그런 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일 것이다. 그럼 ‘재산의 형성에 대한 공헌’은 어떻게 측정해서 분배해야 할까? 재산의 형성에 각자가 미친 공헌을 정확하게 측정해 공헌도만큼 그의 몫을 돌려주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정의롭다고 말할 수 없다.
저자는 재산의 형성 과정을 살피지 않는 ‘최종결과 원칙’ 즉 평등주의는 분배의 기준으로 삼기엔 이론적 근거가 미약하고 현실적으로도 비용이 많이 들어가므로 평등주의를 분배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보다는 재산을 형성할 때의 ‘상황과 실제 성적’만을 놓고 분배를 추진하는 공리주의적 성격의 ‘역사적 원칙’을 분배적 정의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고 또한 그것이 지금 통용되는 기준이라고 한다. 극단적으론, 존재하는 것은 오직 특정한 사물들에 대한 특정한 사람들의 특정한 권리일 뿐이니 우리가 흔히 ‘결과의 평등’과 나누어서 말하는 ‘기회의 평등’도 지극히 조심스럽게, 경제적-사회적 자유의 핵심인 재산권을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추진하고 설계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강의실의 학생들’이 아닌 ‘분업이 극도로 진전된 현대 경제’ 구성원들의 공헌은 어떻게 측정해 분배하는가? 일부 기업에서 시행하는 BSC 따위의 도구가 공정한 측정 지표라고 할 수 있나? 재산형성의 공헌도에 관한 공정한 측정 도구와 공정한 분배시행기구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고 지금도 존재하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저자 역시 그러한 점을 인식해 "우리사회가 옛적부터 압제적이고 부패했으므로, 조선조말기에 특히 그러했으므로, 재산획득 과정에서의 불의는 뿌리가 깊고 널리 퍼졌었다"고 인정한다. 그렇다면 이 현존하는 불의를 우리는 어떻게 시정해야 할까? “답이 없다”가 저자의 진단이다. 왜 답이 없나. “이 문제를 바로 잡는 것은 현실적, 철학적으로 워낙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들며 일부 세력에 의해 악용될 소지가 있기 때문에 현재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그리 나쁘지 않은 길”이란다. 응? 그렇다면 여태 주구장창 떠들었던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정의롭다”는 뭔 말인가? 다 헛소리였나? 문제가 여전히 계속되는데 해결책이 없는 체제를 어떻게 정의롭다고 할 수 있지?
저자는 그래도 여전히 자본주의는 정의롭다고 강변한다. 어째서? 대안체제, 즉 사회주의보다 정의롭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정의롭단다. 세가지 이유를 근거로 제시한다. 첫째로 자본주의의 사유재산제도와 ‘작은 정부’는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될 수 없게 하고 이는 권력의 오용과 부패를 방지해 부패와 재산획득과정의 불의를 줄이기 때문에. 둘째로 자본주의가 보장하는 자유로운 재산이전, 즉 개개인의 자발적 계약을 통한 재산 이전은 불의한 재산 획득 가능성을 줄이기 때문에. 가장 크게 다뤄지는 게 세 번째 이유인 ‘성장’이다. 성장은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 수준을 절대적으로 높일 뿐 아니라 상대적 빈곤도 줄이기 때문에’ 빠른 경제 성장은 공평한 분배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이 이의의 여지가 없을 만큼 증명되었으며 따라서 성장 대 분배의 논쟁은 끝났고, 자본주의는 경제 성장에 관한 한 가장 뛰어난 체제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정의롭다고 한다.
과거의 불의들을 바로잡는 일은 철학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풀 수 없는 문제들을 안는다. 과거의 불의들을 바로잡는 일이 워낙 어렵고 복잡하고 악용되기 쉬우므로 현실적으로는 현재 상태(status quo)를 유지하는 것이 그리 나쁘지 않은 길임을 가리킨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아무리 합리적이라 하더라도, 현상 유지 정책이 매력적이거나 이상적일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의 정의감에 너무 거슬린다. 따라서 '재산 소유에서의 불의'를 들어 자본주의 체제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불의의 시정이 어렵다는 사정을 들어 맞서는 것은 그들에게 도덕적 고지를 내주는 일이고, 자연히, 우리 체제를 제대로 변호할 수 없다.
다행히, 자본주의는 '재산 소유에서의 불의' 주장에 맞서 자신을 변호하는 데 충분한 실적을 이미 쌓았다. 자본주의에선 다른 대안 체제들보다 재산 획득 과정에서의 불의가 덜하다. ...... 자본주의가 대안 체제들보다 덜 부패하고 훨씬 정의로운 까닭들은, 크게 보아, 셋이다.
1) 불의한 재산 획득의 주요 원인은 정부 권력의 오용과 부패다. 자본주의의 사유재산 제도와 '작은 정부'는 사회적 선택과 정부의 크기를 불인다. 자연히, 자본주의에선 부패와 자의적 결정의 여지가 원척적으로 적어서, 불의한 재산 획득이 다른 체제들에서보다 적다.
2) 재산권은 계약들을 통해서 재산을 자유롭게 이전할 수 있는 권리를 본질적 요소로 삼는다. 자본주의가 보장하는 자유로운 재산 이전은 불의한 재산 획득이나 이전이 나올 여지를 크게 줄인다. 분업이 극도로 진전된 현대 경제에선 재산의 획득은 거의 모든 재산들이 많은 이전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다. 자연히, 자발적 계약들을 통한 재산 이전은 불의한 재산 획득을 원천적으로 줄인다.
3) 재산 점유에서의 불의와 기회의 불평등을 바로잡는 일은 엄청난 자원이 드는 일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사회가 부유할수록 정의와 평등을 위한 노력의 성과가 커진다. 근년의 경험은 이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한 나라의 경제가 여러 해 동안 꾸준히 성장하면, 그 사회 구성원들의 삶이 절대적으로 나아질 뿐 아니라 빈부 격차도 차츰 줄어든다. 그리고 경제 성장에 관한한, 가장 뛰어난 체제는 자본주의다.
몰락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 보다는 산업이 발전했던 자본주의 국가들이 더 풍요롭고 자유로웠음은 부정할 수 없다. 논의를 간단하게 하기 위해 남미 등지의 저개발 국가의 경우, 금융 자본주의가 득세한 2000년대 들어 성장과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수준 개선은 더 이상 연결되지 않는다는 일각의 견해를 배제하고 살펴보면 그렇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우월함을 인정한다고 해도 저자의 주장엔 여전히 설득력이 없다. 이런 식으로 논지를 전개할거면 아무리 많이 봐줘도 ‘상대적으로 낫다’고 했어야지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정의롭다’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 한다. A와 B라는 범죄단이 있는데 A가 B에 비해 사람을 덜 해치고 금품을 덜 빼앗았다고 A를 정의롭다고 칭하는 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가?
궤변은 이걸로 끝나지 않는다. 저자는 이제 자본주의가 내부로부터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니, 자본주의는 ‘다른 종들까지’ 그 원칙을 따를 정도로 자연적이고 훌륭한 체제인데 어떻게 내부로부터 거부 될 수 있지? 아무튼 그는 자본주의의 반권위적, 반영웅적, 반신비적 합리성이 역설적으로 반자본주의 문화를 키운다는 슘페터의 ‘자기파괴 경향’, 대중매체의 영향력 증대와 그에 따른 ‘민중주의의 득세’, ‘부러움의 정치학’을 자본주의의 내재적 위협요인으로 꼽는다. 그리고 이 세 요인들 중 부러움의 정치학을 가장 중요하게 다룬다. 부러움의 정치학이란 무엇인가? 저자에 의하면, 개체들의 적응을 통해 형성된 사회적 위계는 보편적이고 뚜렷한 자연계의 현상인데 개체들의 생존과 생식은 사회적 지위에 크게 좌우되다 보니 사회의 전반적 복지보다는 자신의 상대적 지위와 소득만을 살피는 경향이, 즉 ‘시장 경제를 미워하는 마음’이 재산권에 관한 의식과 마찬가지로 ‘진화적으로’ 사람들에게 생겨났다고 한다. 자신들보다 사회적 지위나 소득이 높은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과 미움이 ‘부러움의 정치학’이고 이것은 시장경제의 정상적인 움직임을 막는단다. 부러움의 정치학의 폐해를 신랄하게 지적하는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놀랍지 않게도, 부러움의 정치는 큰 폐해를 낳았으니, 처음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소득의 재분배가 사회적 목표였지만, 근년에는 ‘평등 자체를 위한 평등’이 목표가 되었고 필연적으로 재산권에 대한 비합리적 침해가 점점 심해졌다. …… 부러움의 정치가 가장 거센 분야는 교육이다. …… 시장 경제의 논리를 따라, 교육을 시장에 맡겨 자유로운 선택과 경쟁을 통해서 효율을 높이고, 그런 경쟁에서 뒤진 소비자들에겐, 즉 가난한 학생들에겐, 정부가 사회 안전망인 공교육을 제공한다는 체제는 다수파에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자기 자식들의 사회적 지위지 사회의 전반적 교육 수준이 아니다. 그들이 외치는 것은, 아주 거칠게 말하면, “내 자식이 가장 좋은 교육을 받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의 자식들도 그것을 받을 수 없다”이다. …… 이른바 ‘교육의 하향 평준화’가 그리도 뿌리를 든든하게 내린 까닭이 바로 거기 있다. 그런 부러움의 정치는 다른 많은 분야들에서 거의 같은 모습으로 나와서, 시장 경제의 정상적 움직임을 막는다. 투기가 지닌 경제적 기능들을 무시한 투기적 이익에 대한 징벌적 규제와 과세, ‘강남’에 대한 노골적 질시와 비합리적 규제, ‘재벌 규제’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시장에 대한 정부의 반체제적 개입과 성공적 기업들에 대한 억압 - 그런 예들은 일일이 들 수 없을 만큼 많다.
한마디로 이미 형성된 사회적 위계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는 건데, 역시 이번에도 저자의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재산권은 개인적 자유와 뜻이 겹친다고 해놓고선, 사회적 차원의 복리증진 따위의 허울 좋은 명분이 아니라 각자가 개인적 부를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공동체의 복리를 증진시킨다는 아담 스미스의 논변을 강력히 옹호해놓고선 지금 하는 말은 뭔가? 사회 전반의 복지와 교육수준을 위해 격차를 인정하라고? 가난한 학생이 경쟁에서 뒤질 수 밖에 없음을 스스로도 인정해놓고선 개인적 부의 증진을 위한 가장 강력한 수단인 교육 기회의 확대를 요구하는 걸 어떻게 이런 식으로 매도할 수 있나? 투기를 규제하는 게 시장 경제의 정상적 움직임을 막는 거라니?
납득되지 않는 주장들을 뒤로한 채 저자의 글은 마지막을 맞는다. 자본주의에 대한 내재적 위협을 반자본주의적 ‘밈’에 의해 만들어진 바이러스와 같은 것이라고 규정한 그는 그것들을 생물학과 경제학에 바탕을 두고 자유주의 이념에 따라 만들어진 백신으로 억제하자고 주장한다. 그리고 ‘종교적 신념과 열정을 가지고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려는 세력이 정의를 내세울 때,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정의로움을 강조하자’고 촉구하며 글을 맺는다.
이데올로기 대결은 낡은 것이고 이제 그런 시대는 끝났다는 선언을 ‘시대 정신’으로 만든 측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보라. 도대체 이 책에선 앞뒤 안 맞는 소리를 줄기차게 지껄여댄다는 거 말고는 일관성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저자의 학식이 모자라서 글이 이렇게 지저분한 걸까? 그럴리는 없다는 생각이다. 만약 그와 나의 머릿속에 담긴 것을 비교해서 볼 수 있다면 분명히 엄청난 차이를 나타낼 걸? 어떤 사안이든 이슈를 하나 던지면 동서양의 고사와 저명인물들의 견해를 줄줄이 인용하며 논지를 전개할 수 있는 지적능력을 소유했을 법한 사람이 어째서 이런 형편없는 글을 쓴 걸까? ‘옳지 않은 것을 옹호하려 하다 보면 무리수를 둘 수 밖에 없다’던 진중권의 말을 생각해 보면, 저자의 지루한 횡설수설의 원인은 ‘자본주의는 정의롭다’는 그의 주장과는 달리 그가 옹호하던 대상이 사실은 옳지 않다는 의심을 품게 된다.
복거일은 객관적 위치에서 건조하게 과학적 사실을 기술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며 기득권층이 부를 축적하는 것이 마치 자연적 법칙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처럼, 그래서 그들이 권력을 가지는 것은 과학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자연적 법칙인 것처럼 포장하려 했다. 그러나 뒤엉키고 박약한 논리는 그의 주장에 진실성이 없음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증거의 역할만 할 뿐이다. 나름대로는 우파 이데올로그들에 관한 내 편견-선량한 사람도 몇 명 있지만 대부분은 아주 야비한 거짓말쟁이거나 사태의 한쪽만을 바라보는 헛똑똑이들이다-에 관해 다시 생각해보고자 이 책을 집어들었건만 기대는 깨어지고 말았다. 논리의 저열함, 전공자들마저 지적할 정도로 생소한 개념어 투성이 영어 문장을 그대로 직역한 인용구를 남발하는 난잡한 문장, 뻔히 보이는 능청이 어우러진 이 책에 나는 혐오감까지 느꼈다. 이런 작자가 일각에서나마 지성인 대접을 받고 있는 현실이 서글프다.
엉터리 과학을 경계하며 경제학이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매몰되는 것을 반대했던 걸출한 경제학자와 위대한 과학자의 빛나는 견해를 되새기며 정신을 정화해야겠다.
만약 경제학이 사실상 과학이라면 철의 분자가 자석의 힘에 끌려가듯이 우리 인간도 가격상승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전혀 선택할 수 없는 단순한 로봇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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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과 부의 분배와 같은 핵심적인 경제문제가 중력법칙과 사회적 차원에서 상응하는 법칙에 의해 결정되는가? 조세, 상속권 또는 저임금 착취공장의 존재가 불변하는 자연법칙의 표현인가? 아니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정치적 질서의 아주 변하기 쉬운 결과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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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가 망원경이나 현미경으로 연구한 질서를 받아들이듯이, 그러한 질서는 우리가 수용해야만 하는 사회의 어떤 성질을 반영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또는 만약 우리가 사회의 질서를 승인하거나 반대하는 자신의 의사를 정확히 알고 있다면 적절히 참작해가며 진실로 중립적인 견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 경우에 비록 연구대상이 자연이 아니라 사회의 산물이라 해도 우리의 발견 결과를 설명하는데 ‘과학적’이라는 용어를 쓸 수 있을까?
대답은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경제학이 해명하고자 하는 많은 문제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경제학자들이 자신의 관찰 사실을 빈틈없이 보고해야 한다는 요구조건을 포함하여 과학적 방법을 동원할 수 있는 여지는 많다. 그러나 그것이 정책권고에 이르게 되면, 마치 사회의 기정사실로부터 거역할 수 없이 도출된 것처럼 경제 분석을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회에는 자연의 기정사실과 비교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질서 속에는 권력과 복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경우, 우리는 우리의 설명이 자연의 해명에서 추구하는 객관성을 충족했다고 주장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자연의 작동을 설명하는데 사용하는 언어를 사회의 작동에 적용할 수 있을 뿐이다. 만약 이러한 가짜 과학적인 견해가 경제학의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세속철학으로서는 종말을 기록하게 될 것이다.
천문학과 경제학은 방법론에서 아무런 본질적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두 분야 모두에서 과학자들은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현상들간의 상호연관을 가능한 한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이 현상들에 관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법칙들을 발견하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방법론적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경제 현상들이 관찰되는 환경은 흔히 따로따로 분리해서 평가하는 것이 무척 어려운 많은 요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경제학 분야에서는 일반적 법칙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더욱이, 이른바 인류 역사의 문명시대가 시작된 이래 축적되어 온 경험은, 잘 알려져 있듯이, 결코 그 본질상 경제적이라고 만은 할 수 없는 원인들에 의해 크게 영향 받고 제약을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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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인류 전체의 문제를 다룰 때 과학과 과학적 방법을 과대평가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사회의 조직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에 관해 전문가들만이 자신의 견해를 표명할 권리가 있다고 미리 가정해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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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유전을 통해 고정되어 있고 바꿀 수 없다고 여겨지는 생물학적 특성을 가지게 되는데, 여기에는 인간이라는 종의 특징적인 자연적 충동들이 포함된다. 이에 더하여 인간은 삶을 살아가는 동안 의사소통과 많은 다른 종류의 영향들을 통해 그가 사회로부터 받아들이는 문화적 구조를 획득하게 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뀔 수 있으며, 개인과 사회 사이의 관계를 아주 커다란 정도로 결정하는 것은 바로 이 문화적 구조이다. 현대 인류학은 이른바 원시 문화들에 대한 비교 조사를 통해, 한 사회에서 일반적인 문화적 형태나 지배적인 조직의 유형에 따라 인간들의 사회적 행동에 커다란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이것이 바로 인류의 상태를 개선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희망을 걸 수 있는 점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물학적 특성 때문에 서로를 절멸시키거나, 잔인하고 자기형벌적인 숙명에 좌우되도록 운명 지워져 있지 않은 것이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왜 사회주의인가?], 먼슬리 리뷰 창간호 Monthly Review - May 1949)